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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016 세계의 대학으로 도약과 발전, 국민대학교, 새로운 천년을 열며 제2 도약의 항해로 나서다

  • 2호관에서 북악관으로 불려지기까지

  • 2008년 오늘을 사는 국민인모습

  • 우리대학, 국제화 움직임 활발

  • 국민대신문이 걸어온 60년의 역사

2호관에서 북악관으로 불려 지기까지

"2호관에서 북악관으로 불려지기까지" 15층 북악관(옛 2호관)은 1960년대 우리 학교 구성원 모두의 소망이 담긴 결실이었다. 당시 창성동 캠퍼스는 협소하여 늘어나는 학생 수에 발맞춰 충분한 공간을 마련하기 곤란한 상황이었다. 캠퍼스 이전이 절실하였던 것이다. 그 뒤 후보지로 여러 곳을 물색하던 중 정릉 이곳을 적지로 선정되면서 1965년부터 교사이전을 위한 정릉 교지 매입이 이뤄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3년의 공사 끝에 1971년 9월 1호관(현 본부관)이 완공되면서 창성동에서 정릉으로 이전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2호관 공사가 시작되었다. 2호관이 완성되기 전까지 부족한 공간은 11개동의 임시 건물을 지어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2호관은 2단계로 나뉘어 공사가 진행되었다. 1단계는 1971년 9월부터 1972년 5월까지 공사를 진행하여 6개 층을 완공하였다. 이에 가장 우선적으로 중앙도서관이 1층에서 3층까지 자리하였으며, 나머지 층은 강의실로 사용되었다. 그 뒤 7층부터 15층까지의 2단계 공사가 1972년 4월부터 11월까지 진행되었으며, 내부공사가 완전히 마무리되는 1974년 5월에 비로소 완공하게 되었다. 이로써 공간부족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으며, 학생들의 활동 또한 눈에 띠게 활발해졌다. 

2호관에는 인문대학 등 단과대학 뿐만 아니라 시청각실(7층), 학생회관(9층)이 들어섰으며, 이외에도 교수연구실, 어학연구소, 음악감상실, 박물관, 학보사 등 언론사, 각종 고시준비실 등 다양한 부서가 자리하였다. 당시 2호관은 우리 학교의 모든 단과대학과 부속시설을 전부 수용하는 메머드급 건물이었다. 그 뒤 공학관(1976), 학생회관(1978), 중앙도서관(1979, 현 조형관), 과학관 등이 건설되면서 포화상태에 이른 2호관이 조금씩 숨통을 틀 수 있게 되었다. 1999년 경상관, 법학관이 준공되면서 경상대학과 법과대학이 빠져나갔다. 중앙도서관이 있던 자리는 학생들의 복지를 위한 공간으로 거듭나 미네르바가 탄생하였으며 서점, 안경점 등이 들어서 있다. 

2호관이 지금의 이름인 북악관으로 바뀐 것은 2001년 5월 ‘도약 2000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추진된 새로운 UI(University Identity) 선포와 맞물려 이뤄졌다. 이는 북악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우리 학교에 걸맞으며 국민대학교의 상징적 대표성을 띤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으로 보여진다. 그 뒤 북악관은 2002년 10월부터 조명을 받게 되면서 어둠에 빛나는 아름다운 교정의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 

이제 북악관은 올해로 30년을 맞이한다. 그 동안 수많은 북악인이 한 번쯤 거쳐 갔을 북악관이다. 어느 한 곳 그들의 손길이 머물지 않은 곳이 없다. 해마다 새로운 새내기들이 그 자리를 다시 메우곤 한다. 북악관은 언제나 맏형처럼 듬직하니 그곳에 서있으며 발전해 나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지켜볼 것이다. 

이계형(박물관 특임교수) / ≪국민대신문≫ 2004-03-15

2호관(북악관)131 북악관 야간전경, 북악관 전경, 2호관 준공 후 학교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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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오늘을 사는 국민인모습

출신 고등학교는 수도권 다수, 등교시간 1시간~1시간 30분 가장 많아

먼저 국민인의 출신 지역을 알아보자. 출신 고등학교 소재지를 통해 알아본 출신 지역은 ‘서울’(47.1%)과 ‘경기·인천’(28.2%) 등 수도권 출신이 75%로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다음으로 ‘영남’(11.6%), ‘호남’(4.1%) 순으로 이어졌다. 남·녀 학생간에는 출신 고등학교 소재지 차이가 별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학교 학생들은 어디서 살고, 어떻게 통학하고 있을까. 출신 고등학교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기 때문인지 자택에서 학교를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69.6%). 자신의 집에서 통학하지 않는 경우 14.7%의 학생이 자취를 한다고 응답했고 기숙사나 학사(지방 자치단체 등 공공기관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거주하는 학생이 5.9%를 차지하는 등의 분포를 보였다. 고시원(4.6%)과 친척집(3.4%)이 그 다음을 차지했으며, 하숙을 한다는 학생은 1.8%에 불과했다. 통학 시간(편도 기준)은 ‘1시간~ 1시간 30분 사이’가 29.0%, ‘30분 미만’이 27.2%, ‘30분~1시간 사이’가 22.1%, ‘1시간 30분~2시간 사이’가 15.2%, ‘2시간 이상’이 6.2%를 차지했다. 학생들은 절반이상이 학교에 오기 위해 하루 평균 1시간 이상(편도기준)을 할애해 등하교에 큰 불편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이 통학시 주로 이용하는 교통수단은 ‘버스’ 37.3%, ‘지하철’ 31.1%, ‘도보’ 16.7%의 분포를 보였다. 위의 답변은 주로 이용하는 교통수단에 대한 응답을 나타낸 것이며 실제로는 적어도 절반 이상의 많은 학생이 지하철과 버스를 함께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는 버스로 학교에 들어와야 하는 우리학교 교통 환경의 특성 때문으로 풀이된다.

공강시간에는 친구와 수다, 술자리는 사람마다 달라

수업 외 공강시간에 주로 어떤 활동을 하는지 물었다. 학생의 절반정도가 ‘공강시간에 선배 혹은 친구들과 시간을 보낸다’고 응답했다(43.2%). 이 밖에 학생들은 공강시간을 이용해 ‘밥 또는 간식을 먹거나’(20.6%), ‘공부’(15.7%)등의 활동을 했다. 대학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술이다. 술자리 횟수를 물어본 결과 절반에 가까운 학생이 일주일에 1~2회 정도 술자리를 가지고 있었다(43.2%). 주목할 만한 것은 술자리를 ‘거의 갖지 않는다’는 응답이 두 번째로 많았다는 점이다(38.4%). 이는 개인의 선호도에 따라 술자리 참여 여부가 확실히 갈라지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여자의 경우 남자에 비해 ‘거의 갖지 않는다’고 응답한 학생이 많았다. 남학생은 응답자 중 29.8%만이 ‘거의 갖지 않는다’고 응답한 반면, 여학생은 응답자의 절반 가까운 46.6%가 ‘거의 갖지 않는다’고 답해 남·녀 간에 차이가 발견됐다. 주량의 경우 소주 기준으로 봤을 때, ‘마시지 않는다(술을 마시지 않거나 가볍게 맥주정도)’가 전체의 13.3%, ‘1병 미만’이 29.7%, ‘1~2병 미만’이 36.3%, ‘2~3병 미만’이 15.4%, ‘3병 이상’이 5.3%의 분포를 보였다.

국민인의 실생활-용돈, 아르바이트, 이성

학생들은 어떤 생활을 하고 있을까. 우선 경제적 측면에 대해 물었다. ‘한 달 평균 용돈은 얼마나 됩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20만~30만원 사이’라고 대답한 응답자가 27.6%로 가장 많았고, ‘30만~40만원 사이’(25.5%), ‘10만~20만원 사이’(15.4%), ‘10만원 미만’(14.8%), ‘40만~60만원 사이’(14.1%), ‘60만원 이상’(2.6%)이 그 뒤를 이었다.

월 평균 핸드폰 요금은 ‘3만원~5만원 미만’(41.9%), ‘5만원~8만원 미만’(23.4%), ‘2만원~3만원 미만’(18.0%), ‘8만원~10만원 미만’(10.3%), ‘2만원 미만’(2.2%), ‘10만원 이상’(2.1%) 순서였다.

다음으로는 아르바이트에 관한 질문을 했다. ‘이번 학기 들어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거나 하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41.1%가 ‘예’라고 응답했다. 아르바이트 종류에는 ‘음식점 서빙’(29.4%), ‘과외’(20.6%), ‘백화점, 핸드폰 매장 등 판매직’(12.4%), ‘근로학생’(8.3%), 사무직(7.3%), ‘건설현장직’(2.8%), ‘기타’(19.3%) 순서였다. ‘기타’ 답변으로는 ‘놀이공원’, ‘학원강사’, ‘행사보조’, ‘공장일’ 등이 있었다. 임금은 시간 당 ‘4천원~5천원 사이’가 30.7%로 가장 많았고 ‘7천원 이상’이 22.3%로 그 뒤를 이었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목적으로는 가장 많은 학생이 ‘용돈 마련’을 꼽았다(67.1%). 그 외에는 ‘물건 구입’(11.3%), ‘등록금 충당’(6.3%), ‘저축 등 재테크’(5.9%), 여행자금 마련(5.4%), ‘기타’(4.1%) 순으로 이어졌다.

이성 친구는 있는지 성관계를 가진 경험은 있는지도 물어보았다. 먼저 교제하는 이성 친구가 ‘있다’고 대답한 학생이 30.6%였다. 나머지 69.4%는 없다고 응답했다. 교제하고 있는 기간은 ‘1년~3년’이 30.5%로 가장 많은 응답률을 보였다.

성관계 경험에 대해서는 25.0%가 ‘있다’고 답했다. 성관계를 가진 시기는 ‘대학 재학 중’이 53.3%로 절반 정도의 응답자가 대학 재학 중에 성관계를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그 다음으로 ‘고등학교 때’(23.3%), ‘고등학교 입학 이전’(13.3%), ‘대학 입학 전’(10.0%) 성관계를 가졌다고 응답했다. 성관계를 가진 이유는 대부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64.4%) 였으며 ‘술에 취해서’, ‘성적 호기심 때문에’(각각 10.0%), ‘(클럽 등에서) 부킹을 통해’(6.7%), ‘분위기 때문에’ ‘상대방의 요청’(각각 4.4%)순이었다. 성관계여부 응답의 특징은 남학생이 여학생에 비해 경험이 ‘있다’고 답한 학생이 여학생 보다 2.5배 가량 높았다는 사실이다. 남학생의 경우 전체의 38.6%가 성관계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반면 여학생은 12.8%만이 ‘있다’고 응답해 성별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그 밖에 ‘하루 평균 TV 시청시간’을 물었을 때 ‘1시간 미만’이 51.2%로 절반 이상의 비율을 차지했고 ‘1~2시간 미만’(28.3%), ‘2~3시간 미만’(13.6%), ‘4시간 이상’(3.6%), ‘3~4시간 이상’(3.3%)이 뒤를 이었다. 하루 평균 인터넷 이용 시간에 관해서는 34.4%의 학생이 ‘1~2시간 미만’ 이라고 답했다. 또 ‘2~3시간 미만’이 29.6%, ‘3~4시간 미만’(14.4%), ‘4시간 이상’(8.5%) 라고 대답해 학생들이 적지 않은 시간을 인터넷 이용에 소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책 보다는 인터넷으로 정보 습득, 독서는…글쎄.

이미 인터넷이 현대인의 생활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학교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경로를 통해 사회 전반적인 이슈(정치·사회·문화 등)에 대한 정보를 얻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응답자의 59.2%가 ‘인터넷’이라고 답했다. 이 외 ‘신문·잡지’(18.4%), ‘TV’(14.8%), ‘주변 사람이나 수업을 통해’(5.5%) 순위로 이어졌다.

다음은 정보습득 또는 오락을 위해 한 달에 몇 권의 책을 읽는지 그리고 어떤 분야의 책을 읽는지 조사해봤다. 먼저 ‘한 달에 책을 몇 권이나 읽습니까?’는 질문에 42.7%의 학생이 ‘1~2권’이라고 답했고 ‘1권 미만’이라고 답한 응답자가 35.0%, ‘3~4권’(15.7%), ‘7권 이상’(4.1%), ‘5~6권’(2.6%) 순으로 나타났다. 주로 읽는 분야는 ‘문학’이 41.1%를 차지했고, ‘인문·사회과학’(24.2%), ‘자기계발서’(19.3%), ‘자연과학’(4.7%) 등의 순이었다. 이런 결과는 전체적으로 우리학교 학생들의 독서량이 매우 저조한 상태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최근 보도된 서울대 학생들의 한 달 평균 독서량 1.5권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학교에 얼마나 만족하세요? 그냥… 학교에 대한 국민인의 전체적 만족도는 ‘보통이다’(48.2%) 또는 ‘만족한다’(43.8%)가 비슷하게 나타났다. ‘불만족한다’(4.6%), ‘매우 불만족한다’(2.6%), ‘매우 만족한다’(1.5%) 순이었다. 우리학교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요인으로는 37.7%의 학생이 ‘건물 및 교육시설’을 꼽았다. 다음으로 ‘교수진’(13.5%), ‘학생편의시설’(13.5%), ‘선후배관계’(10.1%), ‘학교의 위상 및 이미지’(7.3%), ‘학생복지 프로그램’(3.6%)가 뒤를 이었다. 한편 ‘기타’(14.3%) 의견 중 많은 학생은 ‘자연 환경’을 만족 요인으로 제시했다.

반면 학교의 가장 불만족스러운 요인으로 31.4%의 학생이 ‘교통 문제’를 꼽았다. 두 번째로 많은 응답을 보인 불만족 요인은 ‘등록금’(27.6%)이었다. 그 외에는 ‘장학금’(10.1%), ‘수업의 질’(10.1%), ‘공간 문제’(9.5%), ‘교육 시설’(6.2%)의 답변이 있었다. 이런 결과는 학생들의 60%에 가까운 수가 ‘교통문제’와 ‘등록금’을 불만족 요인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으로 앞으로 이 두 문제에 대한 개선안 마련이 시급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상응하는 결과로 ‘등록금 액수만큼 혜택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다수의 학생이 ‘그렇지 않다’(47.8%), ‘전혀 그렇지 않다’(26.6%) 등의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최주흥 기자 / ≪국민대신문≫ 2008-05-26

교내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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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대학, 국제화 움직임 활발

대학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책임지는 곳이다. 대학이 능력과 인격을 갖춘 인재를 길러내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하지 못한다면 사회는 존립 기반이 흔들리거나 좌표를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학은 안목을 가진 동량을 기르며 사회에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할 철학을 제공할 책임을 안고 있다. 대학의 이런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안중의 하나가 국제화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국제화는 대학의 핵심 좌표중의 하나이다. 여러 대학의 경우를 종합해 보면 국제화는 학사운영, 유학생 해외 파견, 외국 학생 유치라는 세 가지 측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학사 운영에서는 영어 강의가 확대되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영어 강의 수강을 의무화하고 있기도 하다. 외국인 교수 초빙은 점차 전문성이 검증된 세계적 학자를 초청하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 유학생 파견 또한 양적인 측면에서 탈피해 이제는 해외 유수의 대학에서 보고 배울 수 있는 질적인 측면을 중시하고 있다. 외국에 갖다 오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 정말 중요한 것을 배울 수 있는가라는 실용성이 강조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외국인 학생 유치의 경우에는 장학금과 서비스 제공에 더하여 최근에는 해외에 대학 분교를 설립해 현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재정확충도 도모하려는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예를들어 지방의 한 대학은 중국인 유학생 유치를 위해 학교신문을 중국어로도 제작하는 성의를 보이고 있으며 서울의 어떤 대학은 미국의 로스엔젤레스와 중국 베이징에 분교 설립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 대학은 향후 10년 안에 국내 10위권 대학으로 진입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런 목표는 국제화 부문에도 곧바로 적용될 것이다. 우리 대학은 국제화 부문에 있어서, 지난 학기 해외교류자문위원회를 설치한데 이어 미국의 캔사스 대학, 쿠웨이트 대학과 교류협정 체결하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 방학중에는 미국의 캘리포니아대 데이비스 캠퍼스와 협정을 맺었다. 알다시피 이 대학은 세계적 수준의 학교이다. 이 대학과의 협정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본다. 첫째, 양과 질적인 측면이다. 매년 100명까지 보낼 수 있다는 것은 그동안 우리가 시행해온 선진국 타대학과의 학생교류와 비교할 때 상당히 큰 규모이다. 또 학비와 수업의 질에서도 알찬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둘째,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다. 대학 본부가 안방에 앉아 찾아오는 손님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직접 현장을 찾아가는 “발로 뛰는 행정”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우리는 미국의 유수 대학과 교류하는 것만이 국제화의 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또한 선진국의 국제화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국제화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후진국 대학과의 교류 협정을 통해 유능한 글로벌 인재를 키워내는 것도 우리가 지향할 목표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캘리포니아대 데이비스 캠퍼스와의 교류협정은 우리 대학의 국제화가 앞으로 교류의 양과 질 그리고 문제 해결의 방식에서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는지를 보여준 좋은 사례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학사운영과 외국 학생 유치면에서도 혁신적인 방안이 이뤄지길 기대한다.

사설 / ≪국민대신문≫ 2008-09-03

국제화 국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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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신문이 걸어온 60년의 역사

창성동 시절 ‘국민대학보’로 출발하다

올해로 ‘국민대신문’이 창간 60주년을 맞는다. 그동안 제호도 여러 차례 바뀌고, 중간에 폐간과 재창간 등 적지 않은 굴곡과 변화가 따랐지만, ‘국민대신문’의 60년 자취는 곧 국민대학교의 역사로서, 산증인으로서 숨결을 함께 해왔다.

‘국민대신문’의 전신인 ‘국민대학보’가 처음 발행된 것은 1948년 12월 18일이었다. 그러니 개교한지 2년이 넘을 무렵이었다. 1946년 9월 1일 내수동의 보인상업학교 건물을 빌어 ‘국민대학관’으로 출발한 본교는 교사(校舍)를 구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다가, 1948년 2월에 들어서야 창성동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해 8월에 정규대학으로 승격되면서, 국민대학 학우회가 주도하여 ‘국민대학보’를 발행한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학으로 설립이 추진되었던 본교이건만, 미군정의 탄압과 재정적 어려움 등으로 건학 초창기 혹심한 시련과 수난을 겪어야 했다. 또한 부실 재단의 외면으로, 창성동 교사 신축조차 학생들이 1948년 10월 ‘학생건축위원회’를 조직하여 자치적으로 해결하는 등 학교 건설을 개척해가던 때였다.

학보 발간에는 당시 학생회장 김진호를 비롯하여 남덕우·김익영 등 7명이 앞장 섰으며, 다른 대학에 비교하여 손색없는 학보를 창간해야 한다는 사명감 하나로 정열을 불태워 나갔다. 이들이 학보 창간에 들어간 것은 9월이었으나, 학교 측의 예산 지원도 없고, 지도해 줄 교수도 마땅치 않았다. 결국 학생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면서 편집·제작에 들어갔다. 이들은 학교 근처에 두 평짜리 방을 빌려 숙식을 해결하면서 학업이 끝난 후 늦게서야 창간호 작업에 매달렸다. 편집과 인쇄는 서울신문사에 의뢰하였고 6, 7차례의 거듭된 교열 및 교정을 거쳐 3개월 뒤에 비로소 1948년 12월 18일 창간호를 발간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학보 창간사를 통해 “국민대의 자화상을 영출(映出)하고 순정(純正)한 학풍(學風)을 건립”한다는 목적을 표명하였다. 당시 ‘국민대학보’는 오늘날과 같이 격주간이 아니라, 월간(月刊)으로 발행되었다. 8면으로 편집된 창간호는 시사 보도보다는 학술적 성격이 짙은 학예지에 가까웠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논문을 소개하는데 비중을 두었던 때문이었다. 박일경 선생의 ‘헌법’, 이해종 선생의 ‘경제원론’ 등의 학술적 글과 함께 문화면에는 소설·시·수필 등을 공모하여 게재하였다. 학보는 학생들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받았고, 교수들도 원고료를 일체 사양하면서 원고 투고를 통해 학보 발간을 지원하였다. 그러나 학생들만의 힘으로 발간되던 ‘국민대학보’는 3호까지 간행되다가 결국 폐간되고 말았다. 편집에서 제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비를 학생들이 부담해야 했던 것이 주된 원인이었다.

재단의 안정과 함께 거듭 태어나다

6·25전쟁으로 부산에 피난 가 있던 본교가 1953년 9월 서울로 돌아온 뒤 1955년 6월 25일 학보를 재발간했으나 이 역시 세 번의 발행 후 중단되었다. 창학 초기부터 재단 분규에 휘말렸던 본교는 10여 년 이상을 재단 문제로 시달려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때 폐교 위기까지로 내몰렸던 일도 있었다. 1958년 막바지에 처한 본교는 새로운 재단 물색에 나섰고, 성곡(省谷) 김성곤 선생이 본교를 인수하면서 안정기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럴 무렵인 1959년 7월 1일 본교의 학보도 ‘국민대월보’로 명칭을 바꾸어 재발행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주간교수제가 도입되면서 이종상 교수가 첫 주간을 맡았다. 또한 초창기의 학예지 성격에서 벗어나 시대의 ‘눈과 입, 귀’로서의 언론지로 변신해 갔다. 1960년 4·19혁명은 대학지성의 사회적 역할과 임무를 각성시키는 기제로 작용하였다. 이와 함께 대학신문도 상아탑에 머물지 않고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고민과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선도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4·19혁명을 통한 민주화의 염원과 군사쿠데타, 독재가 뒤얽히면서 한국 사회가 또다시 격랑에 시달리던 때였다. 그 격동기에서 대학신문은 자유와 정의를 위한 지성을 사회에 격렬하게 토해내니, 반독재 민주화 투쟁이 그것이었다. 본교의 대학신문도 기꺼이 민주화의 물결에 앞장 서 나갔다. 그리고 시대적 요청에 따라 1962년 5월 20일 ‘국민대월보’를 ‘국민대학보’로 개제하고 기존의 월보를 격주간으로 발행하면서 대학신문으로서의 시대적 사명에 충실하였다.

북악캠퍼스 시대를 열면서 비약하다

창성동 캠퍼스가 협소하여 1960년대 후반부터 새 부지를 물색하던 본교는 1971년 가을에 현재의 정릉동 캠퍼스로 옮겨왔다. 정릉시대를 열면서 본교는 발전의 웅지를 펼 수 있는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대학 언론도 다양화되면서, ‘국민대학보’ 외에도 1973년 방송국이 발족하였고, 1975년에는 영문신문 ‘The Kookmin Times’를 창간하였다. ‘국민대학보’ 역시 격주간지에서 주간지로 개편하고, 면수를 늘리며 대학신문의 역할을 증대해 나갔다.

주목할 것은 본교의 신문이 어느 대학보다 자율적으로 신문의 전 제작과정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국민대학보’는 오직 학생들의 손으로 그것도 가장 아마추어적인 학생으로 이뤄진 학생기자단에 의해 편집, 제작되었다. 그렇지만 신문 본연의 사명을 지켜나가는데 조금이라도 소홀함이 없었다. 오히려 신문에 대한 애착은 여느 프로 못지 않았다. 비록 얼마 안 되는 인원이었지만 모두 하나가 되어 신문제작에 매달렸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국민대학보’의 남다른 전통과 역사가 쌓여질 수 있었다. 이제 60년의 세월이 쌓이면서, 신문사 주간을 거친 교수가 1959년 이종상 교수 이래 현재 손영준 주간 교수에 이르기까지 40여 명에 이르고, 신문사를 거쳐 간 학생기자들도 5백여 명에 달하고 있다. 그리고 역대 기자들 모임인 ‘필밭’은 선후배 간을 이어주는 교량이 되면서 학보사의 오래된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국민대신문사는 신문 발간 외에도 다양한 문화행사를 주관하면서 대학문화를 선도해 갔다. 1976년 이래 매년 국민문학상(國民文學賞)을 제정하여 운영하다가 1979년 제4회부터는 북악문화상(北岳文化賞)으로 바꾸어 문학·학술분야에 걸친 현상공모를 통해 대학문화의 창달에 크게 기여해 왔다.

민주화 물결에 앞장 서다

1980년대 폭압적인 신공안 정국은 자유와 민주를 외치는 국민의 함성을 외면한 채 한국 사회를 암흑으로 몰고 갔다. 당시 민주화의 염원은 대학을 중심으로 터져 나왔고, 그 중심에 대학신문이 위치하면서 민주주의 수호의 교두보 역할을 담당해 갔다. 이때 ‘국민대학보’는 12면으로 증면하면서 민주화운동을 이끌어 갔으며, 전국적 명성을 얻으며 전국 10대 대학신문으로 꼽힐 정도였다. 이는 민주화운동에 앞장서던 국민대학교 학생지성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대학신문으로서 본연의 임무를 소홀히 할 수도 없었다. 자칫 한 편에 쏠릴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대학신문으로서의 본분을 지켜 나갔다. 이무렵 국민대학교는 종합대학교로 승격한 이래 질적·양적 발전을 거듭하던 때였다. 그리하여 1988년 11월 창간 40주년을 맞이해, 교수·직원·학생 등 모든 북악인의 의견을 수렴하여 가로·세로 혼용방식에서 벗어나 전면 가로쓰기로 편집체계를 개편하는 한편 기사 내용도 국민대 구성원의 다양한 요구를 반영시키는데 힘을 기울여 나갔다. 또한 대외적으로 국민대학교를 알리는 홍보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해 갔다.

국민대 발자취를 집대성한 ‘국민대학보(축쇄판)’을 펴내다

국민대 신문 60년사에서 기념비적 업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국민대학보(축쇄판)’ 8권의 간행을 들 수 있다. 신문은 당대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사료(史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조선시대의 ‘조선왕조실록’이 그렇고, 근현대 신문들이 역사자료로 활용되듯이, 국민대 신문은 곧 국민대 역사의 기초 자료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문의 자료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국민대 신문사는 1991년 당시 학보사 주간인 박종기(국사) 교수의 발의에 의해 1991년부터 2006년에 이르기까지 15년에 걸쳐 창간이래 발행된 국민대 신문을 총집대성하여 축쇄판 8권을 간행한 것이다. 대학신문의 축쇄판 발간은 한국의 대학사회에서 최초의 일이었다. 다른 대학은 엄두도 못낼 때, 축쇄판을 발간한 것은 높은 문화의식에서 발현한 국민대신문사의 업적이자 국민대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이 아닐 수 없다.

새천년을 맞이하여 ‘국민대 신문방송사’로 거듭나다

2000년에 들어서면서 국민대신문사는 국민인 모두를 위한 정보와 토론과 문화의 장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UI선포와 함께 본교가 세계적 웅비를 선포하면서 보다 웅대한 구도에서 발전을 모색할 때, 신문사도 이에 발맞추어 나갔다. 우선 국민대학교의 언론 통합이 단행되었다. 2002년 11월 언론기관으로서 건전한 대학 언론의 정립 및 학풍 조성과 대학 문화 창달, 대학 발전을 위한 홍보 등에 기여하기 위해 국민대신문사, The Kookmin Review, 국민대방송국 등을 통합하여 ‘국민대 신문방송사’로 거듭 태어난 것이다.

아울러 직제 변경을 통해 2003년 3월부터는 ‘국민대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며, 언론의 전문성을 강화해 갔다. 정확·공정·창의를 사시(社是)의 바탕으로 삼은 ‘국민대신문’은 본교 공동체의 원활한 의사소통과 대외홍보, 바람직한 대학문화의 창달을 통해 미래 발전상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국민대신문은 교내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2003년 4월부터 12월까지 국민대 녹색캠퍼스 캠페인을 벌여 그 일환으로 차 없는 녹색캠퍼스를 실현시켰으며, ‘움직이는 가게’를 운영하여 ‘아름다운 가게’ 캠퍼스 1호 국민대점을 여는 등 활동 반경을 더욱 넓혀 나가고 있다.

국민인 모두에게 사랑스런 ‘국민대신문’이 되기를 바라며

21세기 다양한 정보화시대를 맞이해 신문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 독자들이 계몽적 역할, 사실 보도, 여론 수렴을 넘어 생활 정보까지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대학신문은 아카데미즘의 역할도 수행해야 하는 임무까지 부여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경쟁력 시대에서 본교 발전을 위한 차원에서도 신문의 역할 또한 강조되고 있다.

이런 시대적 요청을 ‘국민대신문’은 어떻게 감당해 나가야 할 것인가. 무엇보다 주된 독자인 본교 구성원에 보다 가까이 다가가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1만 5천여 명에 달하는 독자들이 바라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앞길을 밝혀주는 등대가 되어, 그들로 하여금 신문이 간행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끔 해야 한다.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 그 길을 추구해 갈 때 ‘국민대신문’의 진정한 가치와 의미가 찾아질 것이라 믿는다.

흔히 얘기하듯이, 대학신문은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의 기능과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특수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대학신문은 아카데미즘을 배제한 저널리즘, 저널리즘을 외면한 아카데미즘을 늘 견제하면서 평형 감각을 유지해 나가야 한다. 그것은 대학신문이 존재하는 한 불변의 본질일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문성과 시사성, 시대를 꿰뚫는 통찰성을 함께 지녀야 한다. 그래야만 독자의 공감을 얻어낼 수 있고 또 여론을 선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70주년, 나아가 100주년을 맞이할 때, 60주년을 기점으로 국민대신문이 새로운 발전을 이룩했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장석흥(국사학과)교수 / ≪국민대신문≫ 2008-11-24

1. 1982년 우리학교 전경, 2. 우리학교의 역사가 수록돼 있는 국민대신문 축쇄판, 3. 1991.12.19 국민대학보 축쇄판 발간 기념회, 4. 서장흥(국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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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학교 정문에서 출발하는 정릉투어

  • 교환학생에게 묻는다

  • 시각디자인과 출신 판사를 만나다

  • 유지수 총장 인터뷰

학교 정문에서 출발하는 정릉투어
[문화마당]국민인 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정릉투어!

정릉? 정릉!

국민인이라면 ‘정릉’이라는 이름이 익숙하다. 우리학교가 정릉동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릉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정릉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정릉은 길을 지나가던 태조 이성계가 한 여인에게 물 한잔 얻어마실수 있겠냐고 물어보자 여인이 물에 버드나무 잎을 띄워주었다는 일화로 유명한 조선 태조의 두 번째 부인 강(康)씨를 모신 능(陵)이다. 강씨는 조선의 개국과 함께 현비로 책봉되었다가 1396년(태조5년) 죽었다.

태조 당시 정릉은 도성 안(현재 중구 정동의 영국 대사관)에 있었다. 하지만 그 아들 태종 이방원은 즉위 후 아버지 태조가 애지중지하는 정릉을 못마땅하게 여겨 봉분을 파괴하고 도성 밖 양주군, 현재의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산 87-16번지에 있는 이 곳으로 무덤을 옮겼다. 뿐만 아니라 태종은 원래 정릉의 정자각을 헐고,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없애도록 명했다. 그것도 모자라 1410년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정릉의 병풍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게 하여 온 백성이 이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고 한다.

정릉투어

정릉으로 가는 길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먼저 학교 정문에서 길음역 방면으로 가는 153, 1213, 7211 버스중 하나를 타고 세 정거장을 지나 정릉2동 주민센터에서 하차한다. 하차 후 정면으로 보이는 골목길을 따라 10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아파트와 주택들 사이로 정릉의 정문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눈에 띈다. 또 눈앞으로 펼쳐진 울창한 소나무 숲과 탁트인 공터가 시원함을 느끼게 한다. 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이 서있고 왼편으로는 제사 의식을 진행하는 정자각이 있다. 정자각 뒤편으로 언덕이 펼쳐져 있는데 그 언덕의 꼭대기에 바로 능이 있다.

일반 왕릉의 공간이 직선으로 이루어진 것과 달리 정릉은 자연 지형에 맞추어 이루어져 있다. 진입로와 중심 영역인 능이 일직선이 아니라 중간 지점에서 왼쪽으로 꺾여있어 일반적인 능들보다 더 자유롭게 느껴진다. 걷는 방향에 따라 눈앞에서 새로운 풍경이 펼쳐진다.

능과 여러 가지 전통 건물들 외에도 정릉에는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들이 많기 때문에 주민들, 학생들, 연인들은 저마다 삼삼오오 모여 돗자리를 펴고 도시락을 먹으며 이야기 꽃을 피운다. 국민인이라면 한번쯤, 정릉투어!

청수장? 청수장!

이 건물은 1910년대에 세워진 옛 '청수장'을 리모델링한 것이다. '청수장'은 일제강점기 일본인의 별장으로 이용되어 오다가 1945년 해방이 되자 민간인이 인수하여 사용했다. 그러던 중 6.25가 발발하자 특수부대 훈련을 위한 강의실 및 숙소로 쓰이기도 한 역사적인 건물이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난 후 요정 '청수장'으로 다시 한번 탈바꿈했는데 이는 정비석 소설 '자유부인'의 무대로 등장함으로써 세인의 눈길을 끌기도 하였다.

그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변모를 거듭하다가 1974년 이후 일반 음식점 및 여관으로 바뀌어 운영하던 중 1983년에 북한산이 국립공원 제15호로 지정되면서 '청수장'도 국립공원 지역으로 편입되었다. 1998년에 이 건물은 역사성과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여 국가에서 취득하였고 2000년에 건물의 외형을 최대한 보존하는 방식으로 개축하여 2001년 6월 30일 지상 2층 규모의 북한산 국립공원 정릉 탐방 안내소로 문을 열었다.

현재 청수장은 옛 청수장 건물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대를 모두 청수장이라고 부른다. 옛 청수장 건물에서는 자연체험 프로그램, 산행 프로그램, 숲 해설 프로그램 등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청수장투어

정릉과 마찬가지로 청수장도 학교 앞에서 버스를 타면 한번에 갈 수 있다. 110A를 타면 15분 내에 청수장 입구까지 도착한다. 청수장 입구에는 버스정류소 종점이 있고 길의 양쪽으로 갈증난 등산객들을 유혹하는 막걸리 집들이 많다.

길을 따라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다 보면 왼편으로는 맑은 계곡물이 흐르고 앞쪽으로는 일본식으로 지어진 목조건물인 ‘청수장’이 보인다. 예전에 이곳은 계곡에 들어가 물놀이를 하고 가족들과 함께 식사도 할 수 있는 ‘정릉 유원지’였다 하지만 지금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있기 때문에 취사는 불가능 하다. 하지만 상쾌한 공기를 느끼며 산행을 즐기거나 인근 음식점에서 가볍게 막걸리를 한잔 마시기에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장소이다. 또 옛 청수장 건물을 둘러보면서 100년도 더 된 일본식 건물을 감상하는 재미도 느낄 수 있다. 국민인이라면 한번쯤, 청수장투어!

삼봉정사! & 삼봉정사투어

삼봉정사는 우리학교 성곡도서관 오른편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오분 정도만 걸어 올라가면 찾아볼 수 있는 사찰이다. 삼봉정사는 학교와 맞닿아 있는 북한산의 족두리봉, 향로봉, 비봉의 바로 아래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삼봉정사라는 이름이 붙었다. 삼봉정사의 실제 역사는 100년도 넘게 이어져 내려오지만 공식적으로 서울시에 등재된 시기는 1962년이다.

여러 불상들과 대웅전의 모습은 다른 사찰들과 다르지 않지만 삼봉정사만의 다양한 불교 문화를 뽐내고 있다. 아기자기한 동자승 불상도 있고 무서운 장군 모습을 한 불상도 볼 수 있었다.

삼봉정사를 구경하던 중 주지스님을 만났다. 주지스님은 학생들이 더 자주 삼봉정사를 방문해 주었으면 하는 눈치였다. 또 종교를 떠나 문화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며 학생들이 다양한 문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고 말했다. 삼봉정사에 가서 주지스님과 차 한잔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어 보는 것은 어떨까. 국민인이라면 한번쯤, 삼봉정사투어!

시간이 멈춘 그곳, 정릉시장

시장 골목 안으로 마을 버스와 차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모습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시장의 모습과는 조금 달랐다. 두부집과 야채가게, 과일가게, 고깃간, 수선집, 생선가게 사이사이 골목에는 가정집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어 눈앞에 펼쳐진 정릉시장은 시장이기 전에 삶의 터전 그 자체로 보였다. 형형색색 파라솔 아래 야채들이 저녁 찬거리를 사러 온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높은 빌딩과 아파트 숲으로 대변되는 개발도시 서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삼청동이나 북촌 등 전통적인 한옥 마을의 느낌도 아니었다. 뭔가 더 사람사는 냄새가 난다고나 할까. 현대와 과거, 상점과 주택이 함께 공존하는 시장 골목 골목을 돌아다니다보면 영화「건축학개론」속 90년대 감성이 느껴지는 듯 하다. 시장을 가로질러 흐르는 개천에는 한가롭게 청둥오리가 헤엄을 치고 있었다. 내천이 있어서 그런지 정릉시장은 시장의 분주함보다는 여유가 느껴졌다. 따뜻한 봄날에 찾은 정릉 시장의 풍경은 서울이 아닌 듯한, 시간이 멈춘듯한 정취가 이색적인 시장이었다. 영화 속 납득이(조정석)와 승민이(이제훈)가 당장이라도 시장 한 귀퉁이에 앉아 밤새 사랑에 대한 고민을 나눌 것 같았다.

성북구 문화 인프라의 핵심, 아리랑시네센터

서울의 영화관은 대형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대부분이다. 그에 반해 아리랑시네센터는 규모가 작은 소박한 영화관의 모습이다. 독립영화 전용관을 포함하여 3개의 상영관이 고작이다. 관람석도 상대적으로 적다. 1관이 221석, 2관이 173석, 3관이 125석으로 3개관을 모두 합쳐도 대형 멀티플렉스 영화관 한관 정도의 좌석 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리랑시네센터가 성북구민들의 사랑을 받는 건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아리랑시네센터가 위치하고 있는 아리랑고개는 춘사 나운규 선생의 영화「아리랑」의 배경이자 한국 영화의 ‘성지’이며, 민족의 얼 아리랑에 대한 의미를 다시 새겨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영화 「아리랑」의 의미는 특별하다. 감독과 주연을 맡은 나운규 선생은 한국 영화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아리랑」에는 일제강점기 당시 우리 민족의 애잔한 정서가 그대로 녹아 있다. 한편의 영화를 넘어 우리 민족의 역사를 담고 있는 셈이다. 이를 기념해 지난 2001년 아리랑 기념관이 문을 열었고, 지난 2004년 개봉관을 갖춘 아리랑시네센터로 재개관했다. 영화를 테마로 한 다채로운 시설이 있어 단순한 영화관이 아닌 복합 문화 공간의 성격을 띠고 있다.

아리랑 고개의 고갯마루에 들어선 아리랑시네센터는 영화 상영관은 물론 영화갤러리와 미디어센터, 세미나실 등으로 구성된 복합문화시설로 지하 2층과 지상 4층을 합하여 6층 규모다. 지하 1층과 2층은 영화상영관과 편의시설이 자리한다. 1층은 영화 갤러리, 2층은 독립영화 전용관과 나운규 기념 벽 등이 있다. 4층은 아리랑미디어센터가 자리한다. 현재는 4편의 개봉영화와 2편의 독립영화가 상영되고 있으며 티켓 가격은 7천원이다.

상영관을 갖춘 극장이지만 아리랑시네센터를 ‘영화만 보는 곳’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직 절반밖에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리랑시네센터에서는 우리나라 영화의 역사를 두루 살펴볼 수있다. 우선 1층에 있는 영화 갤러리부터 둘러보면, 갤러리라고 해서 그림 만을 전시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영화 박물관에 가깝다. 갤러리에는 우리나라 영화인의 사진이나 세계적인 영화제와 국내 영화제의 트로피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물론 춘사 나운규선생을 기린 춘사영화제의 트로피나 상패도 볼 수 있다.

또한 학생들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장·단편영화 제작프로그램, 아마추어 사진작가 과정, UCC 다큐영상 제작과정, 포토샵·일러스트레이트 과정 등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준비되어 있다.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직접 영화를 만들고 편집하기 위한 장비와 시설도 대여할 수 있다. 프로그램은 한달에 5만원 정도이며 장비와 시설은 하루에 4만원 정도이다. 성북구 도시관리공단에서 운영하기 때문에 사설 업체의 3분의 1가격으로 프로그램 수강과 장비 및 시설 대여가 가능하다.

※ 춘사 나운규 : 한국 영화계의 선구자이자 독립투사로 30년 남짓한 짧은 생애를 조국과 영화에 바친 위인. 1926년 자신의 원작인 「아리랑」을 감독 및 주연한 것을 비롯하여 1936년 마지막 작품 「오몽녀」까지 15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었다. 특히 1936년 「아리랑」의 3편을 제작하면서 녹음장치를 적용시켜 한국영화가 유성영화시대로 전환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문화마당 / ≪국민대신문≫ 2011-09-14

1. 정릉의 전경, 2. 정릉역, 3. 세계문화유산 정릉, 4. ㄱ자모양의입구 능의 모습, 5. 능의 모습, 6. 청수장 앞 비석, 7. 옛 청수장 건물의 모습(전, 후), 8. 청수장 앞 마당, 9. 삼봉정사 대웅전의 모습, 10. 삼봉정사 동자승 조각, 11. 삼봉정사 호랑이 석상, 12, 13. 정릉시장, 14. 성북구 문화 인프라의 핵심 아리랑 시네센터, 15. 아리랑 시네센터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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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학생에게 묻는다

우리학교 국제교류 프로그램은?

우리학교 국제교류 프로그램에는 ▲교환학생 ▲방문학생 ▲복수학위 ▲하계과정 ▲어학연수 등이 있다. 교환학생은 해외 자매 대학에 우리학교 재학생 신분으로 파견되어 1학기 동안 수학하며 취득한 학점을 본교 학점으로 인정해주는 프로그램이다. 방문학생은 교환학생과 비슷한 프로그램으로 1~2학기 동안 수학한다는 점, 본교 및 자매 대학에 이중으로 등록금을 납부하는 점이 다르다. 또한 방문학생에게는 본교 등록금 실납액의 100%에 준하는 장학금과 현지 생활비 지원 장학금이 지급된다. 복수학위는 우리학교 재학생 신분으로 해외 자매 대학에 파견되어 약 2년 동안 수학하고, 졸업조건 충족시 양교의 학위를 취득하는 프로그램이다. 하계과정은 하계방학 동안 해외 자매 대학에서 수학하고 해당 학점을 우리학교 계절학기 학점으로 인정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어학연수는 하계 및 동계방학 중 4주 이상 개별적으로 어학연수를 계획하는 학생들에게 계절학기 학점인정을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학생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교환학생과 방문학생 프로그램으로 그 경쟁률은 평균적으로 2대1정도이며, 통계적으로 영어권 국가에 학생들의 지원이 몰리는 편이다. 이번학기 교환학생은 31개국 58개교에서 학생을 선발하여 다음 학기에 파견할 예정이다.

우리학교와 협정을 맺은 해외 자매 대학은 245개교로, 매년 협정국과 협정교가 증가하고 있다. 국제교류팀 이지연 선생은 “협정교의 증가율에 비해 학생들의 지원률은 낮은 것 같다”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교환학생의 경우, 실제로 상대교에 공석이 생겼으나 우리학교 학생의 지원이 없어서 교환이 이뤄지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이 선생은 “학생들이 관심을 갖고 학교에서 제공하는 기회를 잘 활용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공인 어학성적 없이 지원 가능한 프로그램은 2012학년도 1학기에 신설된 방문학생 ‘어학과정’ 프로그램이다. 기존의 방문학생 정규 과정 프로그램은 해외 자매 대학에서 정규 과정을 수강하기 때문에 파견 대학에서 요구 하는 공인 어학성적과 평점이 필요하나, 어학과정은 해외 자매 대학 부속 어학 기관에서 어학연수과정을 수강하기 때문에 별도의 공인 어학성적이 필요하지 않다. 이 선생은 “어학 자체만을 배우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공인 어학성적에 대한 부담을 갖지 않을 수 있도록 신설한 프로그램”이라며 “이 과정은 외부 유학원의 수임료 없이, 재학생의 신분으로 어학을 배울 수 있으며 ‘방문학생’이라는 이력 또한 생기기 때문에 이점이 굉장히 많은 프로그램”이라고 전했다.

매년 학교의 상황에 맞게 갱신돼 발행되는 국제교류 프로그램 안내책자에는 방문학생 프로그램 이외에 각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와 있다. 우리학교 국제교류팀은 북악관 217호에 위치해 있으며 해외교류 프로그램을 다녀온 학생들의 보고일지, 체험기 등에 관한 정보는 국제교류팀의 싸이월드 클럽 홈페이지(http://club.global.cyworld.com/g/kmu)에서 볼 수 있다.

김지은 기자 kjeun1104@kookmin.ac.kr

박은경(경영·3) 벨기에 HEPL 교환학생

박은경(경영·3)양은 지난 학기 벨기에의 HEPL(Haute Ecole de la Province de Liege)로 교환학생을 다녀왔다. 벨기에 생각이 다시 난 것일까. 박 양은 인터뷰를 하는 동안 웃음을 띠고 있었다.

벨기에 교환학생이 되려는 ‘의지’

박 양은 1학년 마치고 사비를 들여 2년간 중국의 중산대와 프랑스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다. 이후 프랑스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이는 벨기에 교환학생 신청으로 이어졌다. 박 양이 다녀온 HEPL은 봄학기에는 프랑스어로 수업이 진행되고 가을학기에는 영어로 수업이 진행되는데, 박 양은 1학기에 파견돼 프랑스어로 경영학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교환학생을 신청하기 전에 미리 프랑스어 공인 어학성적인 ‘델프(DELF)’ B2(프랑스어 독립구사 단계)를 취득했기 때문에 수업을 듣는 데는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학교에서는 요구하지 않았지만, 프랑스어로 전공 수업을 듣고 따라가기 위해서는 이 정도의 실력은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점 때문에 지원자가 많이 없어서 벨기에 교환학생은 경쟁률이 비교적 낮았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학점보다 중요한 것은 ‘뚜렷한 목표의식'

박 양은 교환학생을 가기 전인 2학년 2학기까지의 평균 학점이 4.3이었다. 교환학생이 되려면 학점이 높아야 하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학점 3.0 이상이면 지원이 가능하고, 3점대의 학점을 가진 친구들도 교환학생을 다녀왔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학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자기가 그 나라에 가야만 하는 뚜렷한 이유’와 ‘그 나라를 가기까지의 준비과정’”이라고 말했다. 교환학생을 그저 취직 때문에 하는 ‘스펙’이라 생각하지 말고, 자기가 어느 나라를 가고 싶은지 구체적으로 목표를 잡고 준비하는 게 더 바람직하다.

유럽의 교환학생 ‘에라스무스’

그리고 유럽에는 ‘에라스무스’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쉽게 말하면 ‘유럽의 교환학생’이다. 에라스무스란 유럽의 국가에서 유럽인들이 원하면 자유롭게 타 학교로 파견되는 프로그램이다. 이 과정에서 현지 정부는 학교를 통해 학생들에게 학비나 생활비를 지원해 준다. 박 양은 유럽인이 아니기 때문에 에라스무스에 포함되진 않지만 현지 학교로부터 허가를 받아 에라스무스 관련 학교에 서류를 제출하면 동일한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실제로 박 양은 이를 이용해 그녀가 머물렀던 ‘리에주’ 지역의 프랑스어학당을 추가비용 없이 이용했고, 조금 더 저렴하게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벨기에에서의 생활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열리는 ‘인터내셔널 디너’는 자신의 국가 음식을 가져와서 같이 맛보는 것이다. 이 때 박 양은 불고기와 해물파전을 가져갔다. 그녀는 “한국에 대해 잘 몰랐던 유럽인들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해줘서 좋았다”고 말했다. 또한 6월 경 열리는 ‘시티 퍼레이드’는 큰 퍼레이드 차가 음악을 틀어놓고 움직이면 사람들이 그 차를 따라서 춤을 추는 축제이다. 그녀는 “젊은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들까지 자연스럽게 맥주도 마시면서, 음악을 즐기고 춤을 추는 점이 인상 깊었다”며 그 때의 기억을 회상했다.

황인목 기자leiok2012@kookmin.ac.kr

반귀은(사법·3) 호주 Sunshine Coast Univ. 방문학생

반귀은(사법·3)양은 올해 1학기에 호주로 방문학생을 다녀왔다. 그녀가 방문학생 프로그램에 지원하게 된 계기는 남들보다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영어 실력 때문이었다. 또한 2년 동안 전공 공부에만 매진한 것이 무료해, 해외로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도 한몫했다고 한다.

공인 어학성적 없이 지원 가능했던 방문학생 프로그램

반 양이 지원했던 방문학생 프로그램 어학과정은 올해 처음으로 학생 선발을 시작했다. 이 어학과정은 방문학생 프로그램 정규과정과는 별도로 개설된 프로그램으로, 공인 어학성적 없이도 지원할 수 있다. 그녀는 “외국 대학에 가서 전공 공부를 하기 보다는 영어공부를 하고 싶었다”며 “공인 어학성적이 없는 나에게 방문학생 프로그램 어학과정은 좋은 기회였다”고 했다. 그리고 “학점을 포함한 1차 서류 전형을 통과한 후 치렀던 2차 면접시험에서도 학교는 현재 나의 영어실력 보다는 왜 해외에 가서 영어 공부를 하고 싶은지에 대한 나의 생각을 중요하게 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반 양이 방문학생으로 호주에 머무른 15주 중 처음 5주는 함께 간 10명의 우리학교 학생들과 영어를 배웠다. 그리고 그 후 시험을 치러 반 배정을 받고 남은 10주를 선샤인 코스트(Sunshine Coast) 대학교에서 호주 대학입시와 비슷한 수준의 IELTS를 공부했다.

호주에서의 홀로서기

반 양은 영어 회화 실력을 더 늘리고 싶은 마음에 사설기숙사가 아닌 홈스테이를 신청했다. 반 양은 “홈스테이를 하면서 그 가족들과 끊임없이 자연스러운 소통을 할 수 있었다”며 “가정집이라서 그랬는지 분위기도 편안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에게 호주에서 생활했던 첫 달은 너무 외롭고 힘들었다. 특히 영어로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다. 반 양은 순간순간 느꼈던 감정들을 노트에 적은 뒤, 사전을 찾아가며 영어로 번역했다.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만 가능했던 감정의 교류는 그녀의 타국 적응에 갑갑한 장애물이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행히 정말 좋은 홈스테이 엄마, 아빠를 만나서 힘들었던 시간이 단축될 수 있었던 것 같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반 양의 홈스테이 부모님은 그녀가 틀린 영어를 구사할 때마다 올바른 표현을 가르쳐 주는 등 그녀의 영어 실력이 나아질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또한 일주일에 두세 번은 꼭 쌀밥을 지어 줬으며 매 주말에는 그녀와 교회에도 함께 가는 등 타국에서 힘들어할 그녀를 늘 배려해줬다.

그녀의 호주 생활은 100점 만점에 85점

반 양은 “호주에서의 프로그램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미리 알고 갔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있다”고 말했다. 호주에서의 생활을 돌아봤을 때 100점 만점에 몇 점을 줄 수 있냐고 묻자 “영어실력은 정말 눈부시게 향상해서 만족하지만, 호주에서의 첫 달이 너무 외롭고 힘들었기 때문에 85점을 주겠다”고 했다. 이어 반 양은 “떠나기 전에 영어회화패턴을 많이 알고 가면 도움이 될 것이고 단어나 문법 공부는 당연히 철저히 준비해서 가야한다”고 강조하면서 국제교류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하면 그만큼 더 수월한 해외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고 전했다.

김지은 기자

김송이(공연예술·4) 터키 Bilkent Univ. 교환학생

김송이(공연예술·4) 터키 Bilkent Univ. 교환학생

지난 학기를 터키에서 보낸 김송이(공연예술·4)양은 이번 학기에 복학해 졸업 준비로 분주했다. 우리나라와 형제의 나라이지만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한 나라인 터키, 그곳의 도시 앙카라에 위치한 빌켄트(Bilkent) 대학교를 다녀온 그녀에게 터키와 교환학생의 매력에 대해 들어보았다.

터키 교환학생이 될 준비

터키는 비영어권 국가이기 때문에 지원할 때 어학성적은 필수가 아니라 가산점을 부여하는 항목이었다. 김 양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토익점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작년에 뉴질랜드에서 어학연수를 하며 받았던 IELTS 점수를 제출했다”고 말했다. 또한 그녀는 필수적인 서류 외에 자신만의 자기소개서를 추가로 첨부했다. 김 양은 “제출할 서류 중 지원동기를 쓰는 공간이 작은 것 같아서 A4용지 2매 정도의 자기소개서를 첨부했다”고 설명했다.

도대체 왜 터키야?

주변 사람들은 그녀에게 의아해하며 “왜 터키냐”는 질문을 많이 던졌다. 보통의 학생들이 영어권 국가의 교환학생을 선호하는 것과 달리, 김 양은 교환학생을 고민할 때부터 영어권 국가는 제외했다고 한다. 인도, 칠레, 페루, 터키 중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터키에 1지망과 2지망을 ‘올인’했다. 그녀는 ‘살면서 터키에 여행을 가볼 수는 있지만 내가 언제 반년이라는 긴 시간을 그곳에서 살아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터키가 아시아, 유럽, 중동의 문화를 고루 담은 독특한 문화를 지니고 있는 점도 끌렸다”고 설명했다.

주말을 통해 떠났던 여행 그리고 추억

그녀는 주말을 틈타 혼자서 터키 곳곳에 여행을 많이 갔는데, 여자 혼자하는 여행이다 보니 외국인 친구가 호신용 스프레이도 챙겨줬다고 한다. 하지만 수많은 여행에도 위험한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터키 사람들은 외국인에게 먼저 다가가고 친절하게 대한다”며 터키인들의 친절에 감탄했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길을 걷는데 갑자기 터키 사람들이 다가와 같이 사진을 찍자고 말했고,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차를 대접했다고 한다. 그녀는 “딱 연예인 병 걸리기 쉽다”고 말하며 웃었다. 심지어 어느 날은 옆 도시로 혼자 여행을 갔다가 그날만 열 잔이 넘는 차를 대접받았고 한다. 게다가 그날 그 지역신문 3곳에서 ‘동양의 작은 여학생이 우리 도시를 찾았다’는 내용으로 그녀를 인터뷰하기도 했다. 김 양은 학기 중에 터키뿐만 아니라 인접한 유럽 국가, 학기가 끝나고는 약 한 달 동안 본격적인 유럽여행을 했다. 그녀는 터키의 지리적 이점에 대해 “터키에서 이탈리아까지 비행기로 2시간쯤 걸려 거리상 가깝고, 불가리아와 조지아는 터키에서 버스를 타고 갈 수도 있기 때문에 유럽여행에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떠나기 전에…

김 양은 “당시에 터키어를 더욱 유창하게 했더라면 여행지에서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과 더욱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을 텐데…”라고 아쉬움을 드러냈다. 또한 그녀는 교환학생을 희망하는 학생들에게 “교환학생의 ‘교환’이라는 말대로 파견된 나라의 문화를 배워서 우리나라에 전달하고, 그 나라에 우리나라의 문화를 전달하는 것도 중요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황지연 기자 / ≪국민대신문≫ 2012-09-10

1. 박은경(경영 3)벨기에 HEPL 교환학생, 2. 반귀은(사법 3)호주 SUNSHINE COAST UNIV. 방문학생, 3. 김송이(공연예술 4) 터키 BILKENT UNIV. 교환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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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디자인학과 출신 판사를 만나다

만화가의 꿈을 품었던 시절, 그리고 흔들렸던 꿈

어려서부터 그림과 소설을 무척 좋아해, 화가나 소설가를 꿈꿨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만화책을 접하게 됐는데, 글과 그림을 한 지면에 나타낼 수 있다는 데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날로 만화가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3년 후,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그림을 배울 수 있는 실업계 고등학교에 입학을 해야 하나. 하지만 그림은 혼자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 실업계 고등학교에는 진학하지 않았다. 한편 그 시기에 감명 깊게 봤던 영화가 있었으니 바로 ‘죽은 시인의 사회’였다. 어린 마음에 외고에 진학하면 영화에 등장했던 한 장면처럼, 철학에 대해 논하고 토론하는 교육의 장이 펼쳐질 거라 기대했다. 그래서 시험 몇 달을 앞두고 영어 문제집 몇 권을 풀며 외고 입시를 준비했고, 대원외고에 진학했다. “사람들은 제 이력을 보고는 제가 엄청난 엘리트라고 생각하는데 사실 오해가 있어요. 제가 입학할 당시에는 서울대 입학을 위해 외고를 자퇴하는 학생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외고 입시 경쟁률이 낮았었죠.” 하지만 막상 외고에 입학하고 보니 ‘죽은 시인의 사회’는 웬걸. 대학 입시 경쟁이 인문계 고등학교보다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서 더 방황했었던 것 같아요. 눈앞에 닥쳤던 상황이 내가 꿈꿨었던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결국 그림을 다시 배워야 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고, 고2가 된 후 미대 진학으로 진로를 바꿨어요.”

그녀는 대학에 원서를 낼 당시 예술대와 조형대의 차이를 명확히 알지 못했었고, 따라서 미술학원에서 권유해준 대로 시각디자인학과에 지원하기로 했다. 그렇게 2001년, 그녀는 우리학교 시각디자인학과에 입학했다. 재학시절을 떠올렸을 때 그녀의 뇌리를 스치는 것은 단 하나. 야간작업, 일명 ‘야작’이었다. “저는 대학생 시절 집에서 잠을 잔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아요. 학교에서 밤을 새거나, 학교 근처 친구 집에서 잠을 자거나. 같이 밤새는 친구들과 야식 시켜먹고, 동트는 걸 보면서 귀가해 씻고 쪽잠자고 다시 등교하는. 기억이 명확하진 않지만,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것 같아요. 열정적이다가도 고달프고, 행복했다가도 다시 힘들고. 전형적인 20대 대학생이었죠.”

그러나 그녀가 대학교 1학년이던 해, 존경했던 만화가 몇 분이 급작스럽게 절필선언을 했고, 그녀는 이를 계기로 만화가의 꿈을 접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만화가로 생존할 자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대신 그녀는 전공이었던 디자인에 더 매진하기로 했다. 대학교 3학년 때는 학교를 휴학하고 제일기획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해보기도 했다. 졸업할 즈음에는 이미 인사가 내정됐던 디자인 회사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제가 디자인을 좋아하지도, 잘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됐어요. 제 성격상 좋아하는 일이 있으면 24시간이고 몰두해서 집중을 하는 편인데, 디자인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았죠. 방학기간 2달 동안은 디자인을 쳐다도 보지 않았어요. 또 제가 작업을 하면서 성공했다고 생각했던 작품들에 대해서 남들은 비판하고, 제가 실패했다고 느꼈던 작업들에 대해서 남들은 칭찬했을 때 확실히 깨달았죠. 디자인은 내 길이 아니구나.”

법을 전혀 몰랐던 디자인학과 졸업생, 사법시험에 도전하다

고심 끝에 졸업 후 디자인을 하지 않겠다고 결정했지만, 예체능계에 있던 사람이 일반 회사에 취직을 한다는 것은 힘들었다. 삼성에 원서를 내보기도 했으나 2차 면접전형에서 탈락했다. 앞이 캄캄했다. 나는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나. 혼란에 빠진 그녀에게 법대를 졸업했던 아버지가 권유했다. “너는 속독과 속필 능력이 뛰어나니, 사법시험을 보는 것은 어떠니.” 단지 그 뿐이었다. 그녀는 그 길로 사법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저는 원래 헌법만 있는 줄 알았어요. 1조부터 한 1000조 정도까지? 하나의 법전에 모든 것이 다 적혀있는 줄 알았죠.” 법에 대해 무지했던 그녀였지만, 배우면 배울수록 법에 빠져들었다. “원래 철학을 좋아했었어요. 그런데 철학은 현실과 약간 유리되는 측면이 있거든요. 하지만 법은 그 자체가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합의 하에 만든 규칙이에요. 하늘이 내린 진리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가 그 규칙을 변화시킬 수도 있는 거고, 그로 말미암아 현실 속에서 정의를 구현하는 것도 가능해요. 철학 속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정의 실현과는 다른.” 법을 통해 억압 받는 다기 보다 나의 권리가 보호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리고 그러한 법들에 의해 사회가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을 때, 또 그러한 법을 우리가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는 자신이 법에 점점 매료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게 사법시험을 준비한 지 1년이 흐른 후, 첫 1차 시험을 치렀다. 선택과목으로 국제법을 선택했고, 이 선택과목은 필수과목이었던 헌법과 같이 1교시에 치러졌다. 그런데 시험 도중 문제 하나에 마킹 실수를 해 답안지를 교체했다. 교체한 후 시간 분배에 착오가 생겼고, 시험 종료 3분을 남겨두고 헌법과 국제법 어느 과목도 답안지 마킹을 시작하지 않은 자신을 발견했다. “남은 시간 동안 헌법을 마킹했죠. 국제법은 백지로 제출할 수밖에 없었고요. 다음 2, 3교시 시험을 엉엉 울면서 치렀죠.” 결국 필수과목 3과목은 합격점을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선택과목이 0점이 나오는 바람에 그 해 1차 시험에서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이는 곧 슬럼프로 이어졌다. 불합격한 이유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기 때문이다. 한참동안 슬럼프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그러다 불현듯 시험을 다시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에 공부가 되든 안 되든 독서실 책상머리에 시간을 정해놓고 앉아있기 시작했다.

결국 다음 해, 1차 시험에 합격했다. 그 해 있는 2차 시험까지는 약 4개월의 기간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1차 시험과는 달리 2차 시험에서는 4과목이나 추가된 데다가, 논술형의 시험이라 그 부담은 매우 컸다. “정답만을 쓰겠다기보다 적어도 답안지는 다 채우고 나오자는 생각으로 공부했어요. 학원에서는 판례를 외우라고 했지만, 시간은 적고 과목은 많고. 불가능했죠. 그래서 저는 문제를 분석하기 시작했어요. 많은 사안 중 왜 하필 이 문제를 출제했나. 이 문제에서의 쟁점은 무엇인가. 왜 모범답안은 이런 식으로 전개되고 있나. 이와 유사한 문제에 있어서 판례의 태도는 어떠한가. 판례비교분석도 했습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공부를 하다 보니 나중에는 문제 해결에 대한 응용력이 생겼고, 결국 시험을 치를 때도 이 응용력이 빛을 발했어요. 실제 시험에서는 3문제 정도나 제가 공부하지 않았던 영역에서 출제됐지만 응용력을 발휘해 답안을 작성했거든요.” 그녀는 결국 그 해 2차 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시험을 준비한지 3년 차 되던 해였다.

합격자가 된 그녀는 사법시험 합격생들이 한데 모여 실무 교육을 받는 사법연수원에 입소했다. “저는 같은 시험을 치는 수험생들을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누군가를 제쳐야 한다’라는 상대적인 기준보다는 ‘아는 것은 절대 틀리지 말자’라는 절대적인 기준을 가지고 시험을 치는 것이 심적으로 편하더라고요.” 그녀의 오픈 마인드 덕이었을까. 그녀는 연수원 졸업 당시, 10등 안에 들어야만 받을 수 있는 ‘사법연수원 상’을 받았다. 또한 사법연수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법관에 임용됐다.

그녀, 법관이 되다

“판례를 만들어 나간다는 점이 좋았어요. 사익은 별개로 두고 오로지 공익만을 고민해도 되는, 어떤 결론이 올바른 결론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전부라는 점에서 매력을 느꼈어요.” 그녀는 올해 법관 3년 차로, 지난 2년은 서울 중앙지방법원 민사부 판사로 올해는 서울 남부지방법원 형사부 판사로 근무 중이다. “판결을 통해 규범력을 정립하는 과정 속에서, 어떤 측면을 더 고려해야 하나 끊임없이 고민하게 돼요. ‘나에게는 사건이지만 당사자에게는 인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항상 고민합니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 꿈을 꾸기도 하지요. 이런 것들을 고민할 수 있는 직업을 가졌다는 것이 참 보람되고 항상 감사할 따름이에요.”

그녀가 법관이 돼 작성했던 판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판결이 2개 있었다. 하나는 ‘이천창고 화재사건’으로, 일용직 인부들이 창고에 불을 붙였는데 불이 붙은 지 1~2분 만에 창고가 전소돼버린 사건이었다. 지금까지는 보통 창고화재가 발생하면 불을 낸 사람에게 손해배상 책임을 물게 했고, 그게 당연했다. “그런데 이 사건은 달랐어요. 불이 붙은 후 삽시간에 전소 돼버린 상황이라, 혹시 창고 구조 자체에 문제가 있지 않나 의심이 들었죠.” 실제 조사해 보니, 창고 자체가 구조적인 결함을 안고 있었다. 이에 그녀는 창고를 관리하는 소유주들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을 무는 판결을 내렸다. “사건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해 책임을 공평하게 분배했죠.”

나머지 하나는 ‘버스차고지 방화사건’이었다. 버스회사로부터 부당해고를 당한 버스기사가 차고지에 불을 질러 버스 38대를 불태워버린 사건이었다. “범죄 자체는 죄질이 매우 나빴죠. 하지만 부당해고를 받은 후 노동위원회에 구제를 요청했던 과정, 노동위원회가 버스기사의 손을 들어줬음에도 버스회사가 이의제기를 해 재심에 회부됐던 과정, 퇴직금 지급의 과정에서 오해가 발생했던 과정 등을 참작해 양형을 했고 징역 5년을 선고했습니다. 하지만 형량이 너무 가벼운 것 아니냐는 비판을 많이 받았었죠.” 앞으로 더 많은 재판을 하고, 더 많은 선고를 내릴 그녀. 그녀는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 항상 고민하는, 진정성 있는 법관이 되기를 꿈꾼다. “재판의 의미, 판사의 역할, 법치주의의 실현, 규범의 정립과 당사자들의 만족 등의 문제들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판사가 되고 싶어요.”

그녀는 후배들에게 해줄 말이 있다고 했다. “대학생 때는 얼마든지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 있고, 그렇게 바꿨을 때의 책임과 손실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발생하는 것 같다”며 “그러니 그러한 전향이 진지한 고민을 통해 도출된 것이라면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타인의 기준에 따른 성공여부를 기준으로 삼지 말고, 대학시절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또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 달리는 순간들로 채워 넣었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후배를 향한 격려의 눈빛이 묻어났다.

  글 / 김지은 기자
사진/ 장유경 수습기자 / ≪국민대신문≫ 2013-06-07

시각디자인 01학번 류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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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수 총장 인터뷰

지난해 우리학교가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으로 선정됐을 때 가장 바쁘게 뛰어다녔을 사람, 바로 우리학교 유지수 총장이다. 이제 학교는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에서도 벗어났고 중앙일보 대학평가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두었지만, 유 총장은 아직도 우리학교가 큰 위기에 있다고 말한다. 이번 <국민대신문> 901호에서 인터뷰를 통해 더 자세한 그의 생각을 들어봤다. <편집자 글>

Q1. 학교 운영, 교육 환경 개선에 있어 가장 큰 장애요소가 있다면 무엇인가?

어떤 조직이든지 변화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고 기존의 것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변하고 있기 때문에, 그 변화에 맞춰서 대학도 빠르게 변해야 한다. 따라서 구성원들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그들 사이에 공감대가 형성되도록 해야 한다. 결국, 소통을 통해 구성원들에게 ‘우리가 왜, 어떻게 변화해야 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알려줄 필요가 있다. 또한 대학을 움직일 때 어려운 것은, 나와 구성원들의 생각을 조절하는 것이다. 본인은 학생들을 위해 조금 더 빨리 움직이고 싶지만, 모든 구성원들이 나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 속에서도 우리가 함께 가야 성과가 나기 때문에, 이를 위해 서로 소통하는 것이 제일 힘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Q2.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 탈피 및 중앙일보 대학평가 개선을 이끈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구성원들의 단합, 합심, 그리고 총장을 믿어주신 결과라고 생각한다.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을 반드시 극복해야 하고, 이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며 호소하고 여러 가지 노력들을 해줘야 한다고 구성원들에게 주문했었다. 이때 교수, 직원, 총동문회까지 함께 도와주셔서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다. 북악가족 여러분께 감사하고, 본인도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좋은 결과의 가장 큰 소득은 구성원들의 ‘자신감’이라고 생각한다. 평가 이후 북악가족의 얼굴 표정에서 자신감과 희망이 느껴진다. 수치적 결과보다도 자신감이 가장 큰 소득이라고 보고 있다.

Q3. 지난해 취약했던 취업률과 전임교원 확보율, 법정부담금 부담률을 어떻게 상승시켰으며,
향후 계획은 어떠한가?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 평가에서 가장 중요한 지표는 취업률이다. 국가 정책적으로 청년실업의 문제가 크기 때문에, 정부는 대학에게 학생 관리와 취업 지도라는 큰 숙제를 준 것이다. 또한 현실적으로 학생들의 가장 큰 고민이 취업이기도 하므로, 이에 대해 많은 노력을 한 것이 성과로 나타났다. 교원과 관련해서 우리는 그동안 ‘교수의 ‘숫자’보다도 ‘질’에 초점을 맞추자’는 정책을 폈기 때문에 정부의 평가기준에는 맞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존의 전략을 조금 수정해서 많은 교원을 신규 임용했다. 이제는 우수한 교수를 임용해 연구 쪽을 강화하는 방향으로도 나갈 것이다. 법정부담금은 우리학교 정직원, 전임교원의 ‘사학연금’을 법인이 일부 부담하는 것을 말한다. 이 법정부담금을 이번에 법인이 전액 부담하게 됐다. 현재 학교법인 국민학원은 학교를 계속적으로 지원하는 데에 문제가 없는 걸로 알고 있다.

Q4. 지난 학기에 학칙 개정을 통해 일부 학과의 ‘학생 정원 조정’이 이뤄졌는데, 앞으로도 계속 진행될 예정인가?

교육부의 정책은 ‘지방대를 살리기 위해 수도권 대학의 인원을 감축하자’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즉, 대학 간 경쟁은 사회주의로, 대학 내 경쟁은 경제 논리로 하라는 것인데 본인 생각과는 정반대의 생각이다. 사회에 필요한 인재가 되기 위해 대학에 입학해서 취업하는 학생도 있지만, 경제적 가치를 중시하지 않고 평생 소설을 쓰거나 난민 봉사를 원하는 학생도 있다. 현재의 교육부 정책이 학생들의 선택의 자유를 뺏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교육부의 지침을 따라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경제적인 논리로 학생들이 잘 안 가는 과의 정원을 감축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답답한 일이지만, 선택의 여지없이 그런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Q5. 내년에 가장 중점적으로 떠오를 학교 경영의 의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의 이상은 취업률에만 목숨 걸지 않고 많은 학생들에게 다양한 교육적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정부가 대학 구조조정을 선언했기 때문에, 정부의 칼날을 피하기 위한 우리의 영리한 전략이 필요한 시기이다. 다양한 학생들의 요구도 충족하면서, 정부가 요구하는 정책에 맞는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Q6. 학교 구성원에게 하고 싶은 말

지금 이 시기에 우리가 잘못하면 나중에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지혜를 발휘하고, 합심해서 나아가야 한다.

황인목 기자 / ≪국민대신문≫ 2013-11-03

유지수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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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수시평, K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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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시평] K군에게

K군! 잘 지내고 있는가? 학과 행사에서 자네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풋풋함이 눈에 선하다. 자네는 꿈을 찾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었지. 나는 자네의 솔직함에서 인간적인 매력을 느꼈어. 그래, 새내기 생활은 어떠한가? 이번 학기를 마치고 입대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오늘은 자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편지를 쓴다.

K군!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자네에게 자신감을 주문하고 싶다. 학생들과 상담을 해 보면 의기소침해 있는 사람이 적지 않아. 이야기를 들어보면, 자신감을 잃었거나 부족한 상태가 많아. 어떤 도전을 해보지 않고,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지레짐작하고 시도하지 않는 경우가 의외로 많아.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않겠다는 심산이야. 괜히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지. 이런 현상은 우리 학교뿐 아니라 오늘날 한국의 20대 상당수에 퍼져있다고 생각해.

자신감의 부족은 어디서 오는 걸까? 그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서 생기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열등감에서도 비롯되는 것 같아. 자네를 포함해 오늘날 한국의 모든 대학생들은 어떤 형태이건 입시경쟁을 헤쳐 온 사람들이야. 각자의 자질과 능력은 편의에 의해 점수로 계량화되었어. ‘상대적인’ 점수 비교에 의해 당락이 결정되었으니, 열등감은 사회적으로 구조화된 측면이 크다고 보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자네를 포함해 많은 젊은이들이 각자의 장점과 특기에 대해 사회적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고 생각해. 아니 기회가 없었다고 생각해.

K군! 지금의 그릇으로 자네를 판단하기에는 자네가 너무 젊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네. 젊음은 자유와 가능성을, 아름다움은 다른 사람과 비교할 수 없는 특권이라고 생각해. 자신감은 어떻게 가질 것인가? 그것은 나 자신의 참모습을 찾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보네. 자신의 본성과 특질을 찾아가는 과정은 대학시절 이뤄야 할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해. 자네를 포함해 한국의 대학생들은 대학이 주는 자유와 새로운 사유구조에 의해 창조적 파괴의 과정을 거친다고 보네. 중고교 시절 배운 틀에 박힌 지식의 구조와 대학의 사유구조 사이에는 엄연히 큰 괴리가 존재하기 때문이지. 지난 시절 배움을 ‘小學’ (작은 배움)이라고 한다면 이제는 ‘大學’ (큰 배움)을 익히고 단련하는 시기이다. 스스로 사유하고 고뇌하며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봐. 학습된 능력인 知(지)에 머물지 않고,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智(지)의 영역으로 사유의 폭을 넓혀야 한다고 생각해. 자신감은 또한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무한히 탐구하고 자율적 사람으로 거듭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해.

K군! 나는 자네가 세상을 향해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해. 자신감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에서 생기는 것이야. 사람은 원래 자신감이 없어서 무엇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시도하지 않기에 자신감이 없는 것이라고 봐. 처음에는 많은 시행착오가 있을거야. 넘어졌다고 또 실패했다고 포기하면 안되네. ‘고통’은 자신감을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이라고 생각하게나. 지금 자네 눈에 보이는 기성의 질서는 자네가 사회의 주인이 되었을 때는 많이 변해 있을거야. 그러니 지금의 질서 속에 자네를 우격다짐으로 끼워 넣지 말고, 자네가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고 생각하게나. 문제는 오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르려고 시도해 보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기억하게나.

K군! 나는 자네가 자신감을 갖고 도전하기를 바라네. 새로운 ‘자기’를 북악에서 키워가길 바라네. 취업에 노심초사하기보다는 진실 앞에 겸허하고 또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다듬기 바라네. 모범적 순응적 인간이 아니라 창조적 모험적 인간으로 거듭나기를 희망하네. 작은 성공이 아니라 큰 성공을 위해 20년 뒤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준비하기 바라네. 진정한 재산은 학위나, 돈이 아니라 인격 자체임을 잊지 말기 바라네. 북악을 거쳐 가는 젊은이들이 좌절하고 불행해진다면, 나는 우리 사회에 미래가 없다고 생각하네.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도 자네를 포함한 북악의 젊은이들의 미래는 밝게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 시작은 자신감과 패기를 갖고 도전하는 것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네. 합리성과 신념이 갖춰진 철학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믿기 바라네.

K군! 군 생활 건강하고, 유익한 시간이 되기 바란다. 그리고 맑은 모습으로 북악에서 다시 만나기를 기대한다.

손영준(언론)교수 / ≪국민대신문≫ 2013-11-16

손영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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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정상을 향한 끝없는 도전! 자작 자동차 동아리 KORA

지난해 2015년 5월, 미국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세계 자작 자동차 대회(FSAE)’에서 세계 4위라는 쾌거를 이뤄내며 국민*인들을 놀라게 한 이들이 있다. 바로 우리학교의 자작 자동차 동아리 ‘KORA’다. “혹시 언제쯤 인터뷰가 가능한가요?”. 인터뷰 약속을 잡기 위한 기자의 질문에 유인석(기계시스템·4)씨는 “방학 내내 학교에 있으니 언제든지 괜찮다”고 답했다. 학교에서 바쁜 방학을 보내고 있는 KORA 팀원들의 모습에서 열정이 전해지는 듯했다. 본지는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 듣기 위해 2010년부터 KORA에 몸담고 있는 자체 홍보팀의 유인석 씨를 만나봤다.

직접 설계부터 제작, 마케팅까지…
“단지 차만 만드는 동아리 아니에요” KORA는 자동차공학과 소속 자작 자동차 동아리로 ‘Kookmin University Research of Automotive Engineering’의 약자로, ‘Kookmin Racing’이라는 의미도 담고 있다. 2001년 포뮬러 차량 제작 동아리 ‘F-1', 오프로드 차량 제작 동아리 'Triple-A'와 저연비 차량 제작 동아리 ‘I.L.C’가 통합돼 지금의 KORA가 탄생했다. 현재 자동차공학과와 기계시스템공학부 에 소속된 약 90명의 학생이 활동하고 있다.

KORA는 차량을 직접 설계하는 것은 물론, 설계 후 자동차가 어떤 성향을 보이는지를 분석하고 이를 토대로 차량을 제작해 대회에 출전한다. 또한 차량을 홍보하고, 차량을 시장에 출시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수익에 관한 발표 등을 포함한 마케팅 활동까지 진행한다. 유인석 씨는 “KORA를 통해 실제 자동차 산업의 축소판을 경험할 수 있으므로 KORA는 단지 차만 만드는 동아리는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방학 때도 밤샘 작업이 일상이지만,그들이 KORA에 매진하는 이유
유 씨는 2010년 신입생 교외 OT 때 KORA에 가입하기로 결심했다. 그날 KORA에서 활동하던 선배가 보여준 ‘세계 대학생 자작 자동차 대회(FSAE)’ 영상이 유 씨가 KORA에 가입한 계기가 됐다. “사실 자동차에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그런데 세계대회에서 10위를 차지한 차가 달리는 영상을 보는데 정말 멋있더라고요. 그래서 우리학교에 입학하자마자 KORA를 찾아갔죠”

KORA 팀원들은 올해 열리는 대회 출전을 준비하며 누구보다 바쁜 겨울방학을 보냈다. 지난 학기에 약 3개월 동안 대회 규정에 맞추고 컨셉을 설정한 차량 설계를 마치고, 방학 동안 차량 제작에 들어갔다. 엔진, 브레이크, 타이어 정도만 기존 완제품을 사용할 뿐 차체 프레임 및 나머지 모든 부품은 팀원들이 손수 제작한다. 그리고 차체 프레임, 브레이크, 변속기, 타이어 등 세분된 제작분야에 따라 또다시 팀이 구성된다.

“방학에도 매일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는 작업실에서 살았어요. 밤샘 작업도 일상이에요. 대회 준비를 하며 1년 정도 휴학을 하는 팀원들도 있어요” 이처럼 바쁜 일정과 힘든 과정 속에서 팀원들과 함께하는 경험은 그들을 더욱 끈끈하게 만들었다. 이전의 전기자동차 대회 출전 당시 경로를 이탈하는 큰 실수를 해 눈물을 삼키던 드라이버 유 씨를 위로한 것도, 다음 대회에서 또다시 실수를 저지를까 걱정하던 그를 격려한 것도 모두 KORA 팀원들이다. “대회가 시작하기 직전 운전석에서 대기할 땐 엔진음이 너무 커서 다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아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지만, 저 멀리서 응원하는 팀원들의 모습을 보니 큰 힘이 나더라고요”.

2015 세계 대학생 자작 자동차 대회
115개 팀 중 종합 4위, 아시아 1위… 그들의 거침없는 질주 비결 지난해 KORA는 미국 미시간에서 열린 세계 대학생 자작 자동차 대회(FSAE)에서 118개 팀 중 종합 4위를, 창작 그린카 경진 대회(KASA)에서 종합 우승을, 그리고 전국 대학생 자작 자동차 대회(KSAE)에서는 2년 연속 종합 1위인 최우수상을 거머쥐었다.

유 씨는 KORA의 성적 비결로 오랜 역사와 이를 바탕으로 한 데이터를 꼽았다. 과거 KORA는 FSAE에서 주행 도중 차량이 멈춰 완주하지 못하기도 했다. “실패한 경험을 토대로 재작년 대회에서 완주를 해내고, 지난해 대회에서도 이전 차량의 문제점들을 보완해 좋은 성적을 거뒀다고 생각해요. 전년도 또는 그 이전의 차량과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아쉬웠던 부분, 개선해야 할 부분들을 보완해 나가요”. 이렇게 팀원들은 실패를 경험 삼아 노력한 끝에 값진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그들이 겪은 수많은 시행착오가 없었다면, 이처럼 화려한 경력을 가진 KORA 역시 없었을 것이다. 한편 졸업 후 자동차 회사에 종사하는 선배들이 자동차와 관련된 지식과 비결을 전수하는 세미나도 KORA에게 큰 힘이 된다.

최고를 향한 끝없는 도전
KORA의 최종목표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최종목표는 언제나 세계 1위”라고 웃으며 답했다. KORA는 이번에 처음으로 모노코크 방식(차체와 프레임이 일체형인 차량 구조)의 차량 제작을 시도한다. 2015 FSAE에서 상위권을 기록한 외국대학의 팀들은 모두 모노코크 방식으로 차의 중량이 160kg대였다. 프레임 방식으로 뼈대와 외형을 갖춘 KORA의 차량은 200kg대인데, 모노코크 방식의 차량은 비용이 많이 들지만 훨씬 가볍고 튼튼하다. “모노코크 방식을 처음 시도하다 보니 어려움도 있지만, 이번 시도를 통해 세계 1위를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는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팀원들이 열심히 다음 대회를 준비 중인데, 성적에 너무 부담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결과보다 중요한 가치는 그 과정에 있음을 그는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고를 목표로 도전을 멈추지 않는 KORA의 모습에서 세계 정상에서 우뚝 설 그들의 모습을 기대할 수 있었다.

특집기사 / ≪국민대신문≫ 2016-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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