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가 ‘해방 후 최초의 민족사학’이라는 사실은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국민대학의 역사성을 온전히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국민대학이 임시정부의 ‘대학’으로 출발한 사실을 모르거나, 간과해 왔다. 국민대학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인 1946년 미군정 시기에 건립되었다. 해방 정국의 격랑에서 탄생한 국민대학은 나라가 없던 처지에서 ‘사립’의 형태를 띠었지만, 여느 ‘사학(私學)’과는 다른 것이었다. 국민대학 건학은 해공(海公)을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이 환국하기 전인 중경(重慶) 임시정부 시절부터 추진되었다. 임시정부는 일제 패망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독립 후 새국가 건설을 위한 건국강령을 마련했고, 교육은 정치·경제와 함께 강령의 골간을 이뤘다. 교육정책에는 대학을 세워 새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한다는 원대한 뜻이 담겨져 있었다.
해방 후 임시정부는 미군정의 방해로 간판을 내걸 처지가 못 되었다. 그렇지만 백범(白凡)을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은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해공이 환국 직후 국민대학 건립을 추진해 갔던 것은 임시정부 교육정책을 실행한 것에 다름 아니었다. 국민대학 건학은 1946년 1월 초 백범의 숙소인 경교장(京橋莊)에서 심도 있는 논의를 거쳐, 동년 3월 국민대학설립기성회 발족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설립기성회 진용도 임시정부 지도자들로 구성되었다. 고문에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 부주석 김규식(金奎植), 명예회장에는 임시정부 외교부장 조소앙(趙素昻), 회장에는 내무부장 신익희(申翼熙)가 선임되면서, 임시정부 주석단이 국민대학기성회를 맡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미군정이 조선총독부의 경성제국대학을 모체로 소위 ‘국립대학’을 세우려 하자, 임시정부 인사들은 5월 18일 설립기성회의 발족 사실을 언론지상에 널리 알리며, 건학운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때 주목할 것은 동아일보가 국민대학기성회의 발족을 ‘국립대학설립준비’라고 보도한 사실이다. ‘국립대학’이라는 보도는 국민대학 건학이 내함한 역사 진실을 정확하게 꿰뚫은 것이었다.
장석흥(국사학과) 교수 / ≪국민대학보≫ 2002-09-02
역사 깊이 보기
임시정부가 세운 '국립대학'
왜 ‘국민’ 대학이라 했나
10년이 훨씬 넘은 이야기이다. 당시 학보에서 한 학생이 본교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학교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있다. '국민체조', '국민복', '국민복권', '국민학교' 등 '국민'이라는 명칭이 너무 흔하고 값싼 느낌을 주니, 본교도 그런 이미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주장의 골자다. 학교에 대한 그 학생의 애착은 높이 살 만하지만, 그야말로 호박에 줄을 그어 수박으로 둔갑시키자는 꼴이다.
'국민'이라는 이름 속에는 여러 가지 뜻이 담겨있다. 한국전쟁으로 서울이 점령되자 그 심장부인 중앙청에서 지척에 있었던 본교는 인민군에 의해 '인민대학'으로 강제로 이름이 바뀐 적도 있다. 그들은 '국민'을 사회주의식 명칭인 '인민'과 같은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90년대 중반 전국의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명칭을 고쳤다. 일제는 조선의 어린 학생들을 교육시켜 천황폐하에 충성하는 사람, 즉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만들자는 뜻에서 위의 단어에서 두 글자를 따서 소학교를 '국민' 학교로 고쳤다. 그런 고약한 이름을 초등학교로 바꾸는데 자그마치 50여 년의 긴 시간이 걸렸다.
'국민'의 또 다른 뜻은 바로 본교의 이름에 담긴 뜻이다. 해방 후 임시정부 인사들은 새로운 국가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본교를 설립했다. 장차 국가와 백성에게 유익한 일을 할 '국리민복'(國利民福)의 인재를 양성하자는 뜻에서 '국민'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던 것이다. 또 당시 미 군정이 '국립' 대학을 설립하려 하자, 미국이 아니라 우리 국민의 이름으로 대학을 설립하자는 해방정국 민족지도자의 소박하면서도 원대한 뜻도 담겨있다.
이쯤 되면 '국민'이라는 이름 속에 값싼 이미지도, 제국주의의 야욕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 세상은 많이 바뀌어 지난 대선에서는 유력한 정당들이 '국민회의', '국민신당', '국민승리21' 등 국민이라는 이름을 앞 다투어 정당 명칭으로 내걸었다. 그런가 하면 각 분야에서 국내 최고 수준의 경지에 오른 것을 두고 '국민타자', '국민가수', '국민가요' 등으로 부르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렇다면 '국민대학' 역시 한국을 대표하는 대학이라는 또 다른 뜻으로 우리 인구에 회자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필자만의 꿈일까?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내실을 채우려는 노력이 따르지 않는 꿈은 몽상에 불과하다. 하찮은 이름이라도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이미지를 창출할 수 있듯이 높고 원대한 뜻을 담고 있는 국민대학이야말로 노력만 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의 격이 되지 않겠는가?
박종기(국사학과) 교수 / ≪국민대학보≫ 2002-09-16
교훈에 담긴 의미
교훈이라면 으레 자유ㆍ진리ㆍ정의 같은 말이 익숙한 사람들에게, '이교위가(以校爲家)ㆍ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교훈은 색다를 뿐 아니라 생소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지금은 그 교훈에 남다른 자긍심을 지니고 있지만, 필자도 교훈에 담겨진 역사성을 이해하기까지 오랫동안 '왠지 교훈으로는 미흡하고 어색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 우리의 교훈은 어떻게 정해졌으며,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본교는 임시정부 건국정책의 일환으로 세워진 '민족의 대학'이었다. 해방 후 많은 대학이 세워졌지만, 본교는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계승한 남다른 역사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 같은 역사성은 오늘날 국민대학 정체성에 원류를 이루지만, 그 때문에 건학 초기에는 미군정의 제제와 탄압 속에서 가시밭길을 걸어야 했다.
그것은 해방 정국에서 임시정부가 겪어야 했던 수난과 다를 바 아니었다. 본교는 민족사회의 뜨거운 관심 속에 출발했지만, 교정(校庭)을 구하지 못한 채 이곳저곳을 전전하거나, 교사(校舍)가 강제로 철거당한 일도 있었다. 이처럼 위기 상황에서 교직원, 학생 등 학교 구성원들은 본교 사수(死守)를 위해 혼연일체가 되어 온 힘을 쏟았다. 때론 교사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미군정 당국에 저항하였고, 사회여론을 통하여 피어린 교사 사수 투쟁을 전개했다.
'이교위가'와 '사필귀정'은 그러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성된 교훈이었다. 그들은 '학교를 내 집처럼' 위했고, 또 '모든 일이 결국에는 정의로 귀결된다'는 신념으로 굳게 뭉쳤다. 그리고 미군정과 이승만 독재정권의 탄압으로부터 국민대학을 끝내 지켜낼 수 있었다. 때문에 그 교훈에는 본교가 헤쳐 온 역사가 온축되어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교훈이 누구의 강요나 일방에 의해 정해진 것이 아니라, 구성원 모두의 자발적 의지로 일궈낸 산물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대학 구성원의 의견을 존중하는 정신으로 이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어느 대학보다 자유스런 본교의 교풍 역시 그 같은 환경에서 형성될 수 있었다.
과거 없이 현재가 있을 수 없듯이, 교훈의 역사성은 현재와 미래 발전을 위해서도 굳건한 버팀목으로 자리하고 있다. 21세기를 맞이하여 세계의 대학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이교위가'의 애교 정신과 끝내 이루고 말리라는 '사필귀정'의 굳건한 신념이 필요할 것이다.
장석흥(국사학과) 교수 / ≪국민대학보≫ 2002-10-07
한국전쟁과 국민대학
무수한 인명을 앗아가며 한반도를 피폐시킨 한국전쟁은, 세계를 냉전체제로 그리고 한반도를 분단구조로 고착화시키며 시대와 함께 흘러가는 국민대학교 역사에도 많은 물너울을 일으켰다. 전쟁 발발 전야인 6월 24일은 국민대학교 역사에서 매우 뜻 깊은 날이었다. 개교 이후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학부 제1회 졸업식이 거행된 것이다. 특히 학생들이 당시 재단에 의해 해임된 해공 신익희 학장의 자필 서명 졸업장의 수여를 요구하다가 일정이 늦어진 졸업식이었다.
식이 끝나고 학생들이 신익희 학장 및 교수들을 모시고 사은회를 가진 후 헤어졌는데 바로 그 다음 날인 25일 일요일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 26일 월요일에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수업이 이루어졌으나 27일에는 북한 비행기가 서울 상공을 나는 등 사태가 더욱 급박해지자 국민대학교는 휴교에 들어갔다. 전쟁의 참화는 교육의 전당도 결코 예외로 하지 않았다.
6월 28일, 전쟁 개시 불과 3일 만에 북한군 탱크가 중앙청 광장에 진입했다. 인민군이 학교를 점령하고 학교에 있던 교직원 및 학생 12명을 철사 줄로 포박하여 종로경찰서로 연행했다. 이어 그들은 책임자를 파견하여 학교를 운영하였는데, 이 때 「국민대학」이라는 간판을 떼어내고 「인민대학」으로 학교명을 바꾸어 간판을 새로 달았다. 「인민」 민주주의공화국의 건설을 꿈꾸는 그들에게 새로운 근대「국민」국가 건설의 열망을 담은 「국민」은 생소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교명에는 바로 이같이 창학의 역사적 의미가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9월 29일,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에 힘입어 3개월 만에 서울이 수복되자 신익희 학장을 비롯해 피난에서 돌아온 교직원과 학생들이 등교하여 약 3개월간 정상수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중국군의 참전으로 연합군이 후퇴하자 국민대학교도 휴교한 채 부산으로 내려가 51년 2월부터 전시연합대학에서 위탁수업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전선이 안정되면서 51년 4월 월세로 건물을 빌려 자치적으로 수업을 진행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이 군에 입대하고 소수의 학생만이 후방요원으로 남아 있어 개교 이래 국민대학교는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1951년 5월 마침내 학생들의 강제입대조치가 완화되고 고등학교 졸업생의 대학진학의 문이 열리면서 국민대학교는 정상궤도를 되찾기 시작했다. 1953년 3월 제4회 졸업식에 이어 4월에는 단독교사를 마련하였다. 이어 같은 해 7월 휴전협정 체결 후 창성동 본교사로 돌아와 9월 1일 제2학기 강의를 서울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한국전쟁은 우리 사회에 많은 희생과 고통을 안겨주었다. 국민대학교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러나 전시하(戰時下)라는 절망과 어둠 속에서도 배움을 향한 젊은이들의 정열은 식지 않았다. 바로 이러한 학문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야말로 국민대학교 역사를 이끌어 온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김동명(정치외교학과) 교수 / ≪국민대학보≫ 2002-10-21
창학 초기 ‘민족론’ 강좌와 정체성
8ㆍ15해방으로 일제의 압제에서는 벗어났지만, 미군정체제 아래 우리는 진정한 주권을 누릴 수 없었다. 때문에 해방정국에서 자주적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일은 무엇보다 절실한 과제였다. 임시정부의 주석단이 전면에 나서 추진했던 국민대학의 건학은 그와 같은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본교의 '다른 역사'는 건학 과정 뿐 아니라 교과 과정에도 반영되고 있었다. 당시 국내 대학에서 본교가 유일하게 개설한 '민족론' 강좌가 그것이다. 1학년 필수과목으로 지정되었던 이 강좌는 1학기 2학점씩 1년 4학점으로 개설되었다.
수업의 내용은 학장 신익희 선생이 직접 독립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경험하거나 느낀 점을 강의하고, 학생들과 독립운동과 민족문제를 토론하는 형식으로 이뤄졌다. '민족론'이라는 강좌명과는 달리, 실질적으로는 독립운동사 강의였던 셈이다. '민족대학'에서 민족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이 강좌는 마치 기독교 학교에서 성경을 의무적으로 교육시키는 것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학생들은 이 강좌를 통해 자연스럽게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한 민족의식을 함양해 갔고, 본교에 대한 남다른 자긍심으로 충만하였다.
그러나 '민족론' 강좌는 해공 선생의 정계 진출과, 또 재정난에 봉착한 본교가 재단분규로 혼란을 겪으면서 중단되고 말았다. 아전인수격인 안목인지는 몰라도, '민족론' 강좌는 1980년대 초반 국사학과에서 '독립운동사' 강좌를 전공과목으로 지정하면서 다른 형태로 부활하였다. 이때의 '독립운동사' 강좌 개설은 국내에서 선구적인 것이었다.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본교에서 '독립운동사' 강좌를 처음 개설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기도 했지만, 이를 통해 독립운동사의 흐름에서 국민대학의 역사성이 재조명될 수 있었다.
그리고 21세기를 맞이하여 정체성 정립을 위한 노력은 2000년에 '해방정국과 국민대학'이라는 교양과목을 개설하는 수준으로 발전되었다. 국내 대학에서 자교사(自校史)를 정식 교과에 개설한 것도 본교가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 같은 자기 역사에 대한 자긍심은 전통을 계승하면서 미래를 열어가려는 본교의 발전에 귀중한 좌표가 될 것이다.
장석흥(국사학과) 교수 / ≪국민대학보≫ 2002-11-11
창학의 뿌리가 같은 경남대학교
경남의 지방 명문으로 발돋움한 경남대학교의 뿌리가 국민대학교에서 갈라져 나온 사실을 아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것같다. 국민대학의 교사(校史)에는 그와 같은 사실을 언급하지 않고 있으나, 『경남대50년사』에는 제1장을 「국민대학 시절」(1946~1952)로 시작하여, 경남대학이 국민대학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경남대의 건학 역사는 해공 신익희 선생에 의해 1946년 9월 1일로 개교한 본교의 창학사와 하나도 틀림이 없다. 그리고 양교의 역사는 1952년 최범술(崔凡述) 재단이 국민대학에서 손을 떼고 해인대학을 별도로 세우기까지 7년여 동안 일치하고 있다. 경남대와 본교의 이 같은 관계는 창학 초기 재단 분규에서 배태되었다. 본교는 임시정부의 대학으로 건립되었으나, 재단을 유치하지 못하여 창학 직후부터 재정적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때 조선불교 중앙총무원 총무부장이던 최범술이 해인사의 사찰 재산을 기부하는 조건으로 1947년 10월 국민대학의 재단을 맡았다.
최범술 재단의 출범 직후 본교는 남산동 동본원사를 거쳐 1948년 2월에는 창성동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리고 정규대학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당초 최범술 재단이 약속했던 재정적 뒷받침은 뜻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기부하겠다던 해인사 재산이 해인사 산문회(山門會)의 반대에 부딪쳤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서 최범술 재단은 1948년 10월 신익희 학장을 해임시키며 학교 운영을 독단적으로 이끌고자 하였다.
이에 교직원·학생은 부실 재단의 축출을 결의하고 본교를 자치적으로 운영해 나갔다. 결국 물러난 최범술 재단은 1952년 또 다른 대학을 세워 나갔으니, 해인사 경내에 세웠던 해인대학이 그것이다. 해인대학은 그 후 진주로 교사를 옮겼다가, 1956년에는 다시 경남 마산으로 교사를 옮겼다. 그런데 이때에도 최범술이 재단에 내놓기로 한 해인사 재산이 산문회(山門會)의 반대에 부딪쳐 좌절되자 해인대학 역시 재단 분규에 휩싸이게 되었다. 해인대학은 재단이 교체면서 1961년 마산대학으로 바뀌었으며, 마산대학은 한때 2년제인 마산실업초급대학으로 전환되었으나 1964년 4년제로 복귀되었고, 1971년 경남대학으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그러니 경남대의 입장에서는 최범술 재단을 매개로 국민대와 연결된 초창기 역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건학의 역사로 볼 때, 양교는 '형제' 내지 '큰집'과 '작은집'의 관계라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양교는 5, 60년대의 역경을 거쳐 훌륭하게 성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 뿌리에서 출발한 본교와 경남대가 앞으로 역사적 공감대를 바탕으로 유대를 돈독히 해나갈 것을 기대해 본다.
장석흥(국사학과) 교수 / ≪국민대학보≫ 2002-12-02
창학 당시 ‘종합대학’의 청사진을 펼친 국민대학
본교가 남다른 역사성을 지니고 있는 사실은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바가 되었다. 즉 임시정부가 세운 대학, 해방 후 최초로 세워진 민족대학, 해방정국에서 유일하게 「민족론」을 가르쳤던 대학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하나 더 추가할 것은 해방 후 최초로 '종합대학'을 구상하고 건학운동을 벌여 갔던 점이다.
미군정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비록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종합대학'을 표방한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현대사에서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국민대학건립취지서'에 밝히듯이, 본교는 "법문계통"은 물론이고 "자연과학", 그리고 국민의 정신방면에 기여할 "종교학", "예과"와 "의학부" 등을 포괄한 종합대학의 설립을 목표했다. 해방 당시 한국에는 일제가 세운 경성제국대학을 제외하고는 몇 개의 전문학교만이 설립된 상태였다. 이들 전문학교는 해방과 더불어 4년제 대학 승격에 힘을 쏟았지만, 종합대학의 구상은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사실 일반 사학(私學)에서 종합대학을 구상한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본교가 창학의 청사진을 '종합대학'으로 표방한 것이다.
이무렵 미군정은 경성대학을 중심으로 기존의 전문학교를 묶어 소위 국립서울대학설립안을 발표하며 종합대학 설립을 추진해 갔다. 그러나 미군정의 국립대학안은 나라도 없는 상황에서 말그대로 어불성설이었다. 그것은 미군정의 '국립'에 불과한 것이지, 우리의 '국립'은 아니었다. 때문에 한국의 뜻있는 지성은 국립대학설립안에 반대하였으니, '국대안 파동'이 그것이다.
본교의 '국민'은 당시 '국립'이 세워질 수 없는 상황에서 국가와 민족을 합성한 용어였으며, 종합대학의 구상 역시 '국대안 파동'에 대응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정이 지배하는 해방정국에서 임시정부가 중심이 된 종합대학의 건학은 용인될 수 없는 일이었다. 학교 인가는 물론 교사도 허가해 주지 않는 상황에서, 본교는 종합대학의 큰 뜻을 일단 접고, 법률·정경학과만으로 출범했던 것이다.
본교는 개교한지 35년 만인 1981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하면서 비로소 창학 당시의 숙원을 풀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 12개 대학, 33개 학부·학과에 학생 수만도 1만 3천여 명에 달하는 대형대학으로 성장하여 명실공이 21세기 명문으로 힘차게 웅비하고 있다.
장석흥(국사학과) 교수 / ≪국민대학보≫ 2003-03-03
개교기념일에 담긴 역사적 의미
매년 10월 18일은 국민대학교의 개교를 기념하는 날이다. 금년은 국민대학교가 개교한 지 57주년이 되는 해이므로, 오는 10월 18일에는 국민대학교 개교의 의미를 되새기고 앞으로의 발전을 다짐하는 57주년 기념행사가 어김없이 치러질 것이다.원래 개교기념일은 말 그대로 개교한 날로 정하든지 아니면 행사를 하기 좋은 날을 택해 정해진다.
본래 국민대학교는 미군정으로부터 인가를 받은 1946년 12월 18일을 개교기념일로 삼아 행사를 치러왔다. 당시는 1학기가 1946년 9월 1일에 시작하였기 때문에 국민대학교는 이에 맞춰 개교를 준비하였고 서울대 또한 마찬가지였다. 해방 후 최초의 사립대학으로 국민대학교가, 최초의 국립대학교로 서울대학교가 각각 설립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 직후 한국에서의 대학설립 움직임은 두 갈래로 나타나고 있었다. 하나는 미군정에 의한 것으로 일제하 경성제국대학이었던 경성(서울)대학을 주축으로 국립대학을 세우려 하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등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환국한 임시정부 요인들을 중심으로 사립대학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 임시정부요인들은 미군정청과 신탁통치와 군정기간 등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1946년 3월 3일, 임시정부요인들은 국민대학설립기성회를 발족하고 대학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막 독립한 조국에 새로운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데에 필요한 중견 ‘국민’을 양성하려고 한 것이었다. 미군정청도 국립대학 설립을 추진해 같은 해 7월 국립대학설립안을 정식 발표했다. 이에 교수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소위 ‘국대안파동’이 그것인데, 반대의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일본제국주의가 설립한 경성제국대학을 모체로 한다는 것이었다.
1946년 8월 22일, 미군정청은 국대안에 대한 반대를 무릅쓰고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에 관한 법령’을 공포했다. 서울대학교는 10월 15일에 개교하였다. 하지만 미군정에 정치적으로 대립하고 있던 임시정부요인들이 세운 국민대학교는 서울대학교보다 약 4개월 늦은 12월 18일에야 비로소 정식 인가를 받았다. 뒤늦은 개교 인가의 기쁨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리하여 그날을 기념일로 삼아 피난지 부산에서도 기념식은 거행되었다. 그 이후 정릉으로 캠퍼스를 이전한 후 추운 겨울이고 방학기간에 개교기념식을 치르는 것이 물리적으로 어려움이 뒤따랐다. 이에 1975년부터 2개월을 앞당겨 10월 18일에 가을 축제를 겸해 개교의 의미를 만끽할 수 있도록 새로운 개교기념일이 만들어졌고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김동명(정치외교학과) / ≪국민대학보≫ 2003-03-31
창성동 시절 학생건축위원회
요즘 우리학교는 캠퍼스 공간의 활용성을 높이기 위해 대운동장을 뒤집으며 대역사(大役事)에 착수하고 있다. 70년대 후반 필자가 학부에 다닐 때에는 이 같은 공사가 이뤄지리라고는 사실 꿈도 꾸지 못하였다. 본부관과 북악관, 공학관 정도가 북한산 줄기에 썰렁하게 서있었던 그때에 비하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학교의 역사는 크게 창성동 시절과 정릉동 시대로 나누어진다. 내수동의 보인상고 건물을 빌려 창학했던 우리학교는 어렵게 남산 동본원사 자리를 교사(校舍)로 얻을 수 있었으나, 미군정의 훼방으로 쫓겨나는 등 시련을 겪다가, 1948년 2월 10일 구 체신이원양성소를 새 교사로 이전하면서 창성동 시절을 열었다.
창성동 교사는 대지 1,200평에 400여 평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건물은 본관 1동과 측면에 2층짜리 일본식 목조건물 2동 등 3동의 목조 건물로 이뤄져 있었다. 그러나 건물의 일부가 불타버리고 3, 4개 정도의 교실만이 남아 있었다. 그나마 반파된 건물은 균열이 심하여 비가 새는 등 위험하기 짝이 없었다. 그럼에도 당시 최범술 재단은 어떠한 대책도 강구하지 않았다. 이에 보다 못한 학생들은 교수들의 동의와 협조아래 부당한 재단을 배제하고, 자치적으로 교사를 신축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렇게 하여 1948년 10월에 생긴 것이 학생건축위원회였다.
그러나 학생들을 믿고 공사를 담당할 업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학생건축위원회는 그런 상황에서 목수 등 기술자를 일당 일꾼으로 고용하며 공사를 강행하였다. 이를 반대한 재단은 공사를 끊임없이 방해하였고, 심지어는 깡패들을 동원하기도 하였다. 학생들은 이에 맞서 투석전까기 전개하며 학교를 지켜 나갔다. 학생들의 열성으로 공사 기간은 오히려 단축되어 1949년 9월 5일 연건평 280평의 목조 2층 교사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교위가(以校爲家)’의 정신아래 학생들이 자치적으로 교사 건립의 역사를 이룩한 창성동 교사는 1971년 정릉동으로 이전하기까지 22년간 본교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요즘 근래 행정 수도 이전 문제가 제기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현재 창성동 구 교사를 사용하는 행정자치부도 이전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때 ‘창성동 구 교사 되찾기’ 운동을 거교적으로 벌일 것을 제안해 본다. 그것은 역사 복원 뿐 아니라, 캠퍼스의 부족한 공간 문제 해결, 본교의 위상 제고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장석흥(국사학과) 교수 / ≪국민대신문≫ 2003-04-14
우리학교의 교표와 교가에 담긴 의미
국기(國旗), 국가(國歌) 등은 그 나라의 신성한 존엄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대표성을 띤다. 한국인으로 외국에 나가 태극기를 본다거나 애국가를 부른다던가 하면 무척 자랑스럽고 가슴 깊이 저려오는 그 무엇인가를 느끼기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강한 소속감에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모습니다.학교도 이를 대표하는 고유의 교기(校旗)와 교가(校歌)가 있다. 하지만 북악인들이 학교의 교기와 교가가 가지는 참된 의미를 새기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밝혀보고자 한다. 우리학교의 설립 초기 교기는, 세월이 흐르면서 약간씩 변화되긴 하였지만, 백성 즉 국민을 뜻하는 잎사귀가 대학이라는 글자를 받들고 있는 형상이었다. 국민대학은 '국민이 받들고 있는 대학'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 뒤 21세기를 향한 도약의 준비로 새로운 교육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교육개혁의 일환으로 2000년 5월 UI선포를 계기로 지금의 교기로 바뀌었다.
교기는 한국의 전통적 오방정색(五方正色, 청·백·적·황·흑)을 기반으로, 바깥의 원은 우주와 세상을, 안쪽의 부드러운 곡선은 백두대간과 북악을 뜻한다. 다양한 개성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거대한 변화를 창조해 나가는 과정을 나타낸 것으로, 국민대학교에서 배출한 인재들이 각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학교의 교가는 언제 만들어졌는지 확인할 자료가 없다. 다만 그 작사자를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학교 교가를 작사하신 분은 시조 시인인 가람 이병기 선생이다. 이병기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한글맞춤법통일안'을 마련하시고, 그 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하셨다. 이러한 그가 우리학교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48년이다. 당시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시면서 국민대학교로 출강하신 것이 계기였다. 당시 국민대학교는 번듯한 교사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던 차, 창성동의 옛 체신이원양성소를 얻어 터전을 닦기 시작한 해였다. 그런 만큼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교가를 만들었지 않았을까 한다. 가사 내용 또한 미군정을 종식하고 우리의 정권을 세운 해이기도 하여, '새로운 민주의 나라 사공을 기르는 국민대학'이라 하여 나라의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하는 뜻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국민대학교 건립취지서에서 "청년에게 심오한 학술을 배양하여 국민대중의 지도자 될 소질과 국가유용의 인재를 육성하고자"한다는 비전을 제시한 것이나, 민족의 자주적 독립국가건설과 새로운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고자 했던 해공 신익희 선생의 창학이념과도 일맥을 같이한다. 이러한 이념은 '도약 2010'으로 이어져 "창의성과 리더쉽을 겸비한 21세기 글로벌 시티즌을 양성하는 세계 속의 명문대학"이라는 비전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우리의 교기와 교가는 학교의 전통과 같이 살아 숨 쉬어 온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태극기'와 '애국가'처럼 언제나 우리의 가슴속에서 활기차게 요동쳐야 하며, 세계 속으로 뻗어나가 우리의 자긍심이 되어야 한다.
이계형(박물관 특임교수) / ≪국민대신문≫ 2004-01-01
나의사랑 국민대학
언 발을 구르며 불기가 없는 강당에 우리는 앉아 있었다. 목마르게 그 누구를 기다리며. 이윽고 홍안백발(紅顔白髮)의 풍채(風采)가 좋은 신사 한 분이 단(壇)에 올랐다. 물론 우뢰(雨雷)와 같은 박수가 터졌지만 어쩌면 자기들 자신에 대한 박수였는지도 모른다. 단(壇)에 선분은 학장신익희 선생이요, 추위도 잊고 앉아 있던 이들은 해방 후 첫 대학생활을 시작하려는 신입생들, 때는 1946년 12월 18일, 곳은 보인상업학교(輔仁商業學校)-벌써 만 30년이 된다.
교사(校舍)도 교구(校具)도 없이 남의 것을 빌려 또한 당시 형편이 권위있고 조예(造詣)깊은 교수를 여러분 모실 수도 없어서, 가르치는 사람이 부족한 상태에서 국민대는 고고성(呱呱聲)을 올린 것이다. 마치 해방직후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지금 생각하면 꿈과 같은 얘기다. 오늘날의 국민대는 우리보다 늦게 개교한 대학들이 거의 종합대학이 되었는데 우리는 아직 소걸음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 비할쏘냐? 종합대학에 못지않은 것이 무엇이고 종합대학이 무어 부럽단 말이냐. 무에서 유를 창조하던 그때, 그러기에 학교 운영자가, 교수가, 학생이, 따로 없는 듯하였다. 학생은 공부하면서 학교건설에 주력하였다. 불의(不義)한 자들과 대항하고자 교문 앞에 바리케이트를 쌓았고 교사(校舍)에서 잠을 자며 학교를 지켰으니 여학생은 밥 짓고 돌 나르는 일을 자원(自願)하여 하였다. 기구(崎嶇)하다 할까 마치 행주산성(幸州山城)이나 진주성의 싸움 때를 방불케 한 한토막이기도 하였다. 돌에 맞아 각목에 맞아 머리가 터졌고 밤새워 대책회의(對策會議)도 하였다.
동본원사(東本願寺) 사건때는 구금(拘禁)되어 군정재판(軍政裁判)을 받은 학생까지 생기는 등, 그러나 시련(試鍊)은 우리에게 불타는 정의감(正義感)과 애교심(愛校心) 그리고 불굴(不屈)의 투지(鬪志)를 길러 주었고 불퇴전(不退轉)의 용기(勇氣)와 인내(忍耐)할 줄 아는 힘을 길러 주었다. 산 공부를 한 셈이다.
학생의 손으로 훌륭하게 본관 2층 교사(校舍)를 준공(竣工)케 했으며 도서관(圖書館)도 만들었다. 서울시내의 대학들이 어쩌고 저쩌고 소용돌이를 칠 때도 우리는 묵묵히 공부하였다.구김살 없이 긍특(矜特)를 가지고 불평불만(不平不滿) 없이 배움의 길을 걷고 닦고 갈았다. 천평이 채 못된 교정(校庭) 둘레에는 식수(植樹)도 하였다. 집의 정원을 가꾸듯이 지금도 창성동(昌成洞) 옛 교사(校舍)에는 30년을 지켜온 푸라타나스가 싱싱하게 거목(巨木)이 되어 있고 버려지려는 옛 일들을 잊지 않으려고 의젓이 서 있다. 1회 졸업생들은 덧없이 흘러 가는 세월을 잡을 량 걸어온 길을 되새길량 허전함을 달랭량 푸라타나스 옆에 스스로 비(碑)를 세웠으니 그 비문(碑文)에,
졸업 20주년 자축(自祝碑)에 지나지 않지만 걸어 온 길이 얼마나 험(險)하고 어려웠으면, 그리고 얼마나 대견하고 보람된 것이 잊지 않으려고 또 잊지 말라고 비(碑)를 세웠겠는가?
우리는 너무 학교를 사랑한 것 같다. 지나칠 정도로 사랑했다. 여북하여 「이교위가(以校爲家)」를 외쳤는가? 그러기에 백발이 성성해진 오늘날에 와서도 모교 잘되기를 나 잘되는 것에 못지않게 기쁘게 여기고 지극한 관심을 기울인다. 그런데 후배 중에는 1회 선배들은 자기들에게 따뜻한 정을 주지 않고 때로는 무시한다고 말들을 하는 것 같다. 그럴 리 없고 그럴 수 없다. 선후배 관계는 혈연과도 같은 것,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혹 세대의 차에서 온 소통의 불여의(不如意)인가, 아니면 자격지심에서 온 것인가? 만학(晩學)을 한 우리 이기에 70대, 60대, 50대가 되어 있다. 재학후배(在學後輩)들이 손자 같고 자식 같아서 아기자기한 맛을 서로 맛볼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렇지마는 우리의 사랑 국민대, 그 주인공 재학제군(在學諸君)들, 우리 어찌 멀리 하고 소홀하게 생각하리요.
정릉골 북악을 등진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그야말로 명당에 우리의 캠퍼스가 서 있지 않나. 아직은 단대(單大)라 하지만 종합대 못지않은 시설, 고명(高名)하고 실력있는 교수진, 3000명에 육박하는 동학(同學)들 재학제군(在學諸君)들이여, 동문제현(同門諸賢)들이여, 바로 우리의 자랑 국민대를 바라 보시요.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안 되어 있다는 것이요, 인간은 분수를 알고 분수에 맞게 살아야 된다고 선현은 말씀하였고, 예수께서는 “만사에 강대하고 담대하며 범사에 감사하여야 된다”고 말씀하시었소. 우리 모두 현실을 직시하고 힘을 모으며, 지혜를 모을 때, 그리고 강대담대(强大膽大)할 때, 범사에 감사하는 생각을 갖고 자세를 취할 때, 국민대의 앞날에는, 우리의 앞날에는, 광명과 발전이 있을 뿐이요.
끝으로 이 한마디를 더하여 두고 열매 맺기를 기원하는 바이요. 5년 전 어느 날 역대 동창회장이 고 성곡 선생과 저녁을 같이 하는 자리에서 고 해공 선생 동상은 성곡 선생이 세우시오, 당신의 동상은 우리가 세우리다, 서로 화답(和答)이 되었는데 그것이 그만 숙제로 남아 머리를 무겁게 하는군요.
이옥영(경제과 1회) 동문 / ≪국민대학보≫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