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 발을 구르며 불기가 없는 강당에 우리는 앉아 있었다. 목마르게 그 누구를 기다리며. 이윽고 홍안백발(紅顔白髮)의 풍채(風采)가 좋은 신사 한 분이 단(壇)에 올랐다. 물론 우뢰(雨雷)와 같은 박수가 터졌지만 어쩌면 자기들 자신에 대한 박수였는지도 모른다. 단(壇)에 선분은 학장신익희 선생이요, 추위도 잊고 앉아 있던 이들은 해방 후 첫 대학생활을 시작하려는 신입생들, 때는 1946년 12월 18일, 곳은 보인상업학교(輔仁商業學校)-벌써 만 30년이 된다.
교사(校舍)도 교구(校具)도 없이 남의 것을 빌려 또한 당시 형편이 권위있고 조예(造詣)깊은 교수를 여러분 모실 수도 없어서, 가르치는 사람이 부족한 상태에서 국민대는 고고성(呱呱聲)을 올린 것이다. 마치 해방직후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지금 생각하면 꿈과 같은 얘기다. 오늘날의 국민대는 우리보다 늦게 개교한 대학들이 거의 종합대학이 되었는데 우리는 아직 소걸음을 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 비할쏘냐? 종합대학에 못지않은 것이 무엇이고 종합대학이 무어 부럽단 말이냐. 무에서 유를 창조하던 그때, 그러기에 학교 운영자가, 교수가, 학생이, 따로 없는 듯하였다. 학생은 공부하면서 학교건설에 주력하였다. 불의(不義)한 자들과 대항하고자 교문 앞에 바리케이트를 쌓았고 교사(校舍)에서 잠을 자며 학교를 지켰으니 여학생은 밥 짓고 돌 나르는 일을 자원(自願)하여 하였다. 기구(崎嶇)하다 할까 마치 행주산성(幸州山城)이나 진주성의 싸움 때를 방불케 한 한토막이기도 하였다. 돌에 맞아 각목에 맞아 머리가 터졌고 밤새워 대책회의(對策會議)도 하였다.
동본원사(東本願寺) 사건때는 구금(拘禁)되어 군정재판(軍政裁判)을 받은 학생까지 생기는 등, 그러나 시련(試鍊)은 우리에게 불타는 정의감(正義感)과 애교심(愛校心) 그리고 불굴(不屈)의 투지(鬪志)를 길러 주었고 불퇴전(不退轉)의 용기(勇氣)와 인내(忍耐)할 줄 아는 힘을 길러 주었다. 산 공부를 한 셈이다.
학생의 손으로 훌륭하게 본관 2층 교사(校舍)를 준공(竣工)케 했으며 도서관(圖書館)도 만들었다. 서울시내의 대학들이 어쩌고 저쩌고 소용돌이를 칠 때도 우리는 묵묵히 공부하였다.구김살 없이 긍특(矜特)를 가지고 불평불만(不平不滿) 없이 배움의 길을 걷고 닦고 갈았다. 천평이 채 못된 교정(校庭) 둘레에는 식수(植樹)도 하였다. 집의 정원을 가꾸듯이 지금도 창성동(昌成洞) 옛 교사(校舍)에는 30년을 지켜온 푸라타나스가 싱싱하게 거목(巨木)이 되어 있고 버려지려는 옛 일들을 잊지 않으려고 의젓이 서 있다. 1회 졸업생들은 덧없이 흘러 가는 세월을 잡을 량 걸어온 길을 되새길량 허전함을 달랭량 푸라타나스 옆에 스스로 비(碑)를 세웠으니 그 비문(碑文)에,

졸업 20주년 자축(自祝碑)에 지나지 않지만 걸어 온 길이 얼마나 험(險)하고 어려웠으면, 그리고 얼마나 대견하고 보람된 것이 잊지 않으려고 또 잊지 말라고 비(碑)를 세웠겠는가?
우리는 너무 학교를 사랑한 것 같다. 지나칠 정도로 사랑했다. 여북하여 「이교위가(以校爲家)」를 외쳤는가? 그러기에 백발이 성성해진 오늘날에 와서도 모교 잘되기를 나 잘되는 것에 못지않게 기쁘게 여기고 지극한 관심을 기울인다. 그런데 후배 중에는 1회 선배들은 자기들에게 따뜻한 정을 주지 않고 때로는 무시한다고 말들을 하는 것 같다. 그럴 리 없고 그럴 수 없다. 선후배 관계는 혈연과도 같은 것,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혹 세대의 차에서 온 소통의 불여의(不如意)인가, 아니면 자격지심에서 온 것인가? 만학(晩學)을 한 우리 이기에 70대, 60대, 50대가 되어 있다. 재학후배(在學後輩)들이 손자 같고 자식 같아서 아기자기한 맛을 서로 맛볼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렇지마는 우리의 사랑 국민대, 그 주인공 재학제군(在學諸君)들, 우리 어찌 멀리 하고 소홀하게 생각하리요.
정릉골 북악을 등진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그야말로 명당에 우리의 캠퍼스가 서 있지 않나. 아직은 단대(單大)라 하지만 종합대 못지않은 시설, 고명(高名)하고 실력있는 교수진, 3000명에 육박하는 동학(同學)들 재학제군(在學諸君)들이여, 동문제현(同門諸賢)들이여, 바로 우리의 자랑 국민대를 바라 보시요.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안 되어 있다는 것이요, 인간은 분수를 알고 분수에 맞게 살아야 된다고 선현은 말씀하였고, 예수께서는 “만사에 강대하고 담대하며 범사에 감사하여야 된다”고 말씀하시었소. 우리 모두 현실을 직시하고 힘을 모으며, 지혜를 모을 때, 그리고 강대담대(强大膽大)할 때, 범사에 감사하는 생각을 갖고 자세를 취할 때, 국민대의 앞날에는, 우리의 앞날에는, 광명과 발전이 있을 뿐이요.
끝으로 이 한마디를 더하여 두고 열매 맺기를 기원하는 바이요. 5년 전 어느 날 역대 동창회장이 고 성곡 선생과 저녁을 같이 하는 자리에서 고 해공 선생 동상은 성곡 선생이 세우시오, 당신의 동상은 우리가 세우리다, 서로 화답(和答)이 되었는데 그것이 그만 숙제로 남아 머리를 무겁게 하는군요.
이옥영(경제과 1회) 동문 / ≪국민대학보≫ 19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