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9월, 임시정부요인들이 설립한 해방 후 최초의 사립대학인 국민대학교가 창성동에서 처음 둥지를 틀었을 때의 입학정원은, 법률학과와 경제학과에 각각 50명씩 총 100명이었다.
2년 후인 48년에는 정치학과가 신설되어 입학정원이 150명으로 늘어났으나, 이 정원은 1957년까지 10여 년간 제자리걸음을 하였다. 안정된 재단을 확보하지 못해 재단선정을 둘러싸고 벌어진 학내 분규가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1957년 285명으로 입학정원이 증가하기 시작해 다음해는 365명으로 늘어났으나, 1962년에는 14년 전의 정원인 150명으로 다시 급감하였다. 바로 전해인 61년 5·16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이 일방적이고 획일적인 대학정비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후 64년에 265명, 67년에 445명, 68년에 475명으로 조금씩 회복세를 보이는 가운데 기존의 정원을 겨우 유지하는 선에서 60년대를 마감했다.
1970년대는 약진의 시기였다.
1972년 620명으로의 증원을 시작으로 78년에 1,090명, 79년에는 1,210명으로 점증해 마침내 1,000명 시대를 열었다. 이 기간은 71년 9월 창성동에서 지금의 정릉동으로 캠퍼스가 이전한 이후 안정된 재단의 지원 아래 종합대학으로의 승격을 위해 꾸준히 준비했던 시기이다.
1980년 1,500명 시대를 열며 종합대학승격인가를 받고, 81년 종합대학의 첫 새내기 1,530명을 맞으며 87년까지 중형종합대학을 지향하게 된다. 그러나 중형대학이 안고 있는 여러 한계를 극복하고자 다시 입학정원증원에 나서 1988년 1,760명, 1992년 1,850명, 93년 1,910명으로 점증하다가 94년에는 2, 190명으로 2천명 시대를 힘차게 열며 대형종합대학으로의 도약을 꾀하게 된다.
다음 해에는 2,510명으로 입학정원이 늘어나 개교 50년 만에 무려 25배의 성장을 이루고, 1998년에는 3,050명으로 3,000명 시대가 개막되어 현재 서울 캠퍼스 편제 정원 기준 6위에 랭크되었다. 입학정원의 증가는 주로 양적인 성장을 보여주는 수치이며, 반드시 질적 발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급격한 입학정원에 따른 연구·교육 시설을 비롯한 공간의 부족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양적 성장이 질적 발전의 토대가 될 수 있다는 것 역시 확실하다.
그 동안 국민대학교는 양적 성장에 걸맞게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노력을 계속해 왔으며 최근 그 성과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단순한 외형적 성장을 넘어 내실 있는 발전을 이루는 것이 오늘날 국민대학교에 주어진 과제인 것이다.
김동명(정치외교학과)교수 / ≪국민대신문≫ 2003-09-01
역사 깊이 보기
입학정원으로 본 학교 역사
건물로 본 학교 역사
종합대학승격과 명문사학으로의 웅비를 꿈꾸며 창성동에서 정릉동으로 캠퍼스를 옮겨온 1971년 9월 당시의 국민대학교 건물은, 제1호관인 현재의 본부관이 유일한 것이었다.
본부관은 1969년부터 공사를 시작해 약 2년 반만인 1971년 9월 9일 학교 이전에 맞춰 준공했다. 총 9천 5백여만원의 공사비가 소요된 총면적 4,962㎡의 이 건물은 그 당시로서는 초현대식 철근 콘크리트 5층 건물이었다. 제1호관이 준공되던 날 제2호관인 현재의 북악관을 기공했다. 1974년 5월 24일 준공한 15층 높이의 이 건물은 총면적 22,670㎡에 총4억 2천여만의 공사비가 소요되었다. 당시의 대학건물로서는 초고층ㆍ초현대식 건물이었던 제2호관은 본격적인 정릉동 시대의 개막을 알리며 이후 오랜 동안 학교의 메인 건물로서 기능했다.
1976년 3월 공학관 준공을 시작으로, 78년 5월에는 학생회관이, 1979년 9월에는 중앙도서관(현 조형관)이 개관하였다. 또한 이듬해인 1980년 11월에 체육관이 완공되고 12월에는 민속관이 준공됨으로써, 같은 해 실현된 종합대학 승격과 함께 그에 걸맞은 규모의 건물 면적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어 1983년 8월 제3호관(현 과학관)의 개관으로 건물확장이 일단락되었다.
1990년대 들어와 급증하는 학생 수에 대응하기 위해 다시 건물 증축이 시작되었다. 1993년 6월 성곡도서관이 신축되고, 1995년에는 조형관이 증ㆍ개축되었으며, 본부관ㆍ공학관ㆍ학생회관의 증축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1997년에는 공학관 별관 및 영빈관이 개관했으며, 1999년에는 국제교육관이, 2001년에는 예술관이 각각 완공되었다. 또한 2003년 3월 지방 학생들의 오랜 꿈이었던 생활관(기숙사)이 문을 열었다.
이상 본 바와 같이 정릉동으로 이전한 이래 국민대학교의 건물은 꾸준히 증가해 왔다. 이는 학생정원 수의 증가 등과 함께 학교의 외적 성장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양적 성장이 곧 질적 성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건물 보유면적 중 교육기본시설로 산정되는 건물 보유율의 변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1970년대 줄곧 100%를 밑돌던 면적 보유율은 1981년을 기점으로 100%를 넘어서 83년의 160%를 정점으로 87년에는 155%를 상회했다. 그러나 1988년부터 100%대가 깨지기 시작해 1998년에는 68%대로 추락했다. 2001년부터 70%를 회복하며 다시 증가하기 시작해 2003년 현재 86%로 100%대 회복을 위해 나아가고 있는 추세에 있다. 질적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양적 성장의 중요한 부분인 건물 면적의 확장이 아직도 국민대학교는 절실하다고 할 수 있다.
김동명(정치외교학과)교수 / ≪국민대신문≫ 2003-10-13
우리학교의 교상, '용두리'의 역사를 되새겨보며
교문을 지나 올라오다 보면 가장 먼저 마주치는 것이 교상, ‘용두리’이다.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맞잡고 용솟음치려한다. 이러한 웅혼한 기상을 보여주는 용두리가 그곳에 자리하기까지는 각고의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했다.
교상에 대한 첫 논의는 개교 20주년이 되는 1966년 신문사(학보사) 추진사업의 일환으로 제기되었다. 당시 여론 조사를 통해 ‘흑마’가 교상으로 결정되어 ‘흑마들의 잔치’라 하여 단합된 구실을 하였지만 확정되지는 못하였다.
그 뒤 교상문제는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1974년도에는 백호, 1977년도에는 거북이, 1981년도에는 학 등이 거론되었으나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였다. 이미 선정된 교상은 바뀔 수 없다는 절대성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했지만, 웬만한 동물들은 이미 타대학에서 선점한 상태여서 선택 폭이 좁아 중론을 하나로 모으는데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이에 1981년 총학생회에서 교상설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동물이 아닌 ‘풍차’로 의견을 모았으나 북악의 이미지를 담고 있지 못하다하여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그 뒤에도 교상 논의는 계속되어 1983년 대학 구성원 모두가 참여한 가운데 교상위원회가 발족하여 쌍용과 반달곰으로 의견을 수렴하였으나, 그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이렇듯 교상을 정하는데 어려움에 봉착하자, 교상이 꼭 있어야 하느냐는 회의적인 반응이 일기도 하였다. 그러나 국민인 모두가 학교를 상징하는, 대외적 홍보를 위한 교상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그만두기도 힘들었다.
이에 1986년 총학생회가 ‘교상건립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개교 40주년에 맞춰 국민인의 정신적인 구심점이 될 교상을 확정시킨다는 목표아래 사업을 추진하여 백호를 교상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10월 축제기간 동안에 북악관에 대형 백호그림이 걸렸을 뿐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하고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전 국민인의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하였던 것이다.
교상 건립문제는 1991년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학교측에서 교상건립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 총학생회장 선거 입후보자 모두가 이를 정책공약으로 내세우는 등 분위기가 한층 고조되었다. 그 결과 1992년 6월 국민인의 각 대표자가 참여한 가운데 교상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교상건립학생추진위원회가 별도로 신설되면서 교상 건립을 위한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우선 재학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투표에서 쌍용이 결정된데, 이어 교상건립추진위원회가 최종적으로 이를 확정하였다. 이후 교상 건립사업은 탄력을 받게 되었다. 교상 디자인과 명칭이 공모되는 한편, 건립기금마련을 위한 전 국민인의 모금운동이 펼쳐졌다. 그 결과 개교이래 47년만인 1993년 6월 모든 국민인의 숙원이던 교상, 용두리가 지금 그 자리에 서게 되었다.
우리 학교의 상징이요 구심체 역할을 할 용두리가 세워진지 10년이 흘렀다. 용의 모든 힘은 여의주에서 나오기 때문에, 여의주를 빼앗기면 모든 힘을 잃게 된다고 한다. 과연 우리 스스로가 여의주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반문해봐야 할 것이다.
이계형(박물관 특임교수) / ≪국민대신문≫ 2003-10-27
전임교원 인원으로 본 학교 역사
개교 직후인 1947년 국민대학교의 전임교원 인원은 15명이었다. 학장 겸 교수였던 해공 신익희 선생을 비롯해 대부분이 일본에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이었다. 5명이 국내에서 경성제대(京城帝大)를 졸업하였고, 나머지는 도쿄제대(東京帝大), 교토제대(京都帝大), 그리고 와세다대학 등에서 수학한 일본 유학파였다.
이후 자세한 전임교원 인원의 변화는 알 수 없으나, 1961년에는 25명, 그리고 1971년에는 26명임이 확인된다. 정치적 격동기였던 1960년대는 정부의 불안정한 대학 정책 등으로 말미암아 전임교원 인원에 큰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1970년대의 전임교원의 전체 인원을 알 수 있는 데이터는 없으나 다행히 신규 임용인원에 관한 자료는 입수할 수 있으므로 그 대강의 변화를 a파악할 수 있다. 1972년에 16명을 시작으로 73년 9명, 74년 13명, 75년 16명, 76년 25명, 77년 11명, 78년 6명, 79년 9명, 80년 19명 등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그 결과 1981년에는 전임 교원 인원이 116명에 이르게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 특히 71년 창성동에서 현재의 정릉동으로 캠퍼스를 이전하면서 학생 입학 정원의 비약적인 증가와 더불어 전임교원 인원도 크게 늘어났던 것이다.
1981년 종합대학 승격 이후 전임교원 인원은 계속해서 증가해 1986년 150명을 넘어섰으며 1990년대에 들어와서 급격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1991년 176명으로, 1994년에는 205명으로 200명대를 돌파하였다. 이어 1996년에는 241명으로 급증하고, 1998년 261명, 2000년 283명을 지나 2002년에는 307명으로 300명 시대를 맞이하였다.
전임교원 인원의 증가는 학생 입학정원 및 건물 면적의 증가 등과 함께 학교의 양적 성장을 잘 보여준다. 1970년대 이후 국민대학교의 전임교원 인원은 꾸준히 증가해 왔다. 그러나 이 역시 곧 학교의 질적 성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질적 발전 평가를 가늠하는 전임교원 1인당 재학생 수의 경우 국민대학교는 아직 높은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 1998년 제2학기의 경우 37.40명, 1999년 제2학기는 40.74명, 2000년 제2학기는 41.39, 2003년 제1학기 현재는 39.34로 여전히 40명대를 육박하고 있다. 이는 전국 평균 33.0(2001년도)을 훨씬 웃도는 수치이며, 국내 유수 대학의 2배에 가까운 수준이다. 최근 외부 기관에서 실시하는 대학평가에서 국민대학교가 구성원들이 기대한 만큼 평가받지 못하는 원인의 상당 부분이 여기에 있다. 현재 국민대학교는 급속한 양적 팽창에 다른 질적 발전을 달성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는 우수한 전임교원 인원의 조속한 증가에 의해 앞당겨질 것이다.
김동명(정치외교학과)교수 / ≪국민대신문≫ 201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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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용순이와 떠나는 국민대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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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와 함께한 성곡동산 24년
북악인의 안식처로 자리매김 -
600호(1993.4)에서 699호(1993.3)까지 100호 간의 학보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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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정보화사회 인재양성 으뜸대학
용이·용순이와 떠나는 국민대 여행
신입생 여러분 안녕하세요. 먼저 전통을 지키며 미래를 열어 가는 우리 국민대학교에 입학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북악골 곳곳을 누빌 용이와 용순이라고 하지요. 고등학교 시절엔 꽉 짜인 시간표대로 기계처럼 생활을 했겠지만 대학은 그렇지 않습니다. 듣고 싶은 과목에 따라 시간표도 자유롭게 짤 수 있고 강의가 없는 시간(공강)엔 여러 가지 취미활동도 할 수가 있거든요. 하지만 자유가 주어진 만큼 책임도 따른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겠지요? 그럼 북악인이라면 한 번쯤 가 봤을만한, 공강 시간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을 만한 우리 학교 내의 보물을 같이 찾아가 볼까요?
AM 9:20
“용이 오빠, 후문 앞에 있는 저 한옥은 뭐예요, 우리도 들어갈 수 있나요?”
음, 저 곳이 가장 궁금한가 보구나. 저 곳은 현재 민속자료 제7호로 지정되어 있는 조선조 말 한성판윤(현 서울시장) 한규설 대감의 저택이야. 전통적인 한국 대저택의 전형인 이곳은 원래 장교동에 있었는데 1980년에 지금의 자리에 이전 복원되었지. 이후 우리대학의 민속관으로 개관되어 다도(茶道) 학습장소, 조선시대 주택에 관한 건축 강의, 전통문화에 대한 학습과 연구 등에 사용되고 있어.
“오빠, 의미는 대충 알겠는데요, 너무 따분해요”
하하, 그렇겠군. 그럼 민속관의 단아한 연못과 정자를 보여줄게. 이 연못과 정자는 고궁과는 또 다른 옛 정취를 느낄 수가 있지. 봄과 가을에 꽃잎과 단풍이 물위에 내려앉으면 더더욱 그러하고.
“정말 아름답다. 제 친구랑 꼭 다시 와보고 싶어요”
하지만 앞으로 볼 기회는 별로 없을 거야. 몇 년 전에 아름다운 풍경에 취해 술을 마신 학생이 사고를 낸 적이 있어서 평소엔 개방을 잘 안하거든.
“정말이요? 에이 아쉽다. 다른 학교에 다니는 친구에게 소개해 주고 싶었는데…”
그래도 민속관 안에 있는 ‘명운다회’라는 동아리를 찾으면 녹차를 마실 수 있으니 꼭 데려오렴.
AM 11:50
국민아, 너 뭐하고 있니?
“어, 용순이 누나 안녕하세요? 앞으로 3시간 동안 수업이 없는데 아직 친한 친구도 없고… 그래서 그냥 방황하고 있어요”
그래? 심심했겠구나. 나를 따라와 봐.
“어디로 가는 거예요?”
짜잔∼ 여기 2호관 808호는 국민대 안의 비디오방이라고 할 수 있지.
이 영상도서실은 북악인들의 어학실력 향상을 위해 TV 모니터, 비디오 컨트롤 등 최신기기를 갖춘 20석의 개인 좌석을 설치하여 비디오테이프를 개별 청취 및 시청할 수 있도록 되어 있어.
“에이, 여기도 공부하는 곳이잖아요”
잠깐만 내 말을 더 들어봐. 여긴 어학 테이프뿐만 아니라 네가 좋아하는 영화도 많이 있단다. 학생증만 있으면 여기 있는 영화목록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즐길 수 있지.
“이야, 내가 좋아하는 ‘Sound of Music’도 있네. 한 번 또 봐야지. 고마워요 누나”
PM 1:20
“구석기는 뗀석기, 청동기는 간석기… 조선 음음 태, 종, 태, 세, 문, 단 ,세… 중얼중얼”
북악아,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오니?
“아니요, 도서관 5층 박물관에 다녀오는 길이에요. 암각환가 뭔가는 처음 봤는데 정말 신기했어요”
참 좋은 걸 봤구나, 우리학교 박물관은 토기나 공예품 외에 다른 박물관이 갖추지 못한 ‘설촌고문서’와 ‘암각화’ 같은 사료적 가치가 대단히 높이 평가되는 매우 귀중한 자료를 소장하고 있단다. 또 국내·외 문화영상자료를 VTR과 슬라이드로 상영하기도 해.
PM 2:40
“좋은 공부를 하긴 했는데 좀 피곤한 것 같아요”
그래, 공부도 좋지만 가장 중요한 건 체력이야. ‘체력은 국력’이란 말도 있잖니?
“맞아요,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진 오로지 공부, 공부라는 소리만 들어서 운동할 시간이 없었어요. 솔직히 제가 게으른 탓도 있었지만”
그렇구나. 하지만 이제 걱정하지마. 우리학교에서는 공부면 공부, 체력이면 체력 이 두 마리 토끼를 둘 다 잡을 수 있거든. 자, 여길 봐.
“우와, 헬스장이네. 다들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같다. 근데 여기를 정말 공짜로 이용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럼, 여기 체육관 1층에 마련된 헬스센터는 체육복만 착용하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단다.
“끙끙, 어휴 무거워. 앞으로 여기서 체력단련 좀 열심히 해야겠어요”
열심히 운동하고 옆의 샤워실에서 시원하게 샤워도 하렴.
“그렇지만 남자 탈의실·샤워실과 여자 탈의실·샤워실이 구분되어 있었으면 더 좋겠어요”
그건 그래. 이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학생들의 이용이 미비한 실정이지. 아, 그리고 학생회관 지하 1층에 가면 탁구장이 있어서 탁구도 칠 수 있단다. 탁구채가 없으면 옆에 있는 탁구반에서 빌려주기도 해.
PM 4:10
자. 이제 왠만큼 돌아본 것 같은데 용두리 뒤에 있는 성곡동산에 올라가 술이나 한 잔? 아니지, 아니지 학교 전경이나 둘러보자. 성곡동산은 우리학교의 전망대이자 북악인의 휴식처로 사용되고 있지.
♬왜 태어났니, 왜 태어났니… 풍덩∼♪
“용이 형, 저 선배들이 용두리에서 뭐하고 있는 거예요?”
저기 물에 빠져있는 사람이 죄인라면 오늘이 생일인 죄지 뭐.
“그럼 생일날 용두리 물에 빠지게 되나요?”
북악인이라면 대부분 한 번쯤은 여기에 빠져 봤을 거야. 나도 예외는 아니지.
“앗! 내일이 생일인데”
하하, 조심해라. 용두리 물은 공업용수로도 못쓴다는 소문이 있지 아마… 자자, 걱정은 그만 하고 성곡동산에 올라가보자. 어때, 기분이 상쾌해지지 않니? 마음이 울적하고 답답하거나 조용히 쉬고 싶을 땐 성곡동산만큼 좋은 곳도 없지.
PM 7:00
용순아, 이만하면 우리학교의 보물을 다 찾은 셈일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지. 이것들 외에도 학생생활 연구소, 음향 도서실, 인터넷 전자통신학교, 각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 65개의 동아리들… 헉헉, 그리고 종합서비스센터, 이발관, 음반점 등등등 골라 가는 재미가 있다구.
그렇지 참, 나머지 보물들은 신입생들이 직접 찾을 수 있도록 남겨둬야겠지? 그럼, 여기에 나온 국민이, 북악이가 모두 신입생 여러분입니다. 동기들과 내년에 입학할 후배들과 우리학교의 보물을 찾아보세요. 그리고 가장 소중한 보물은 여러분 자신임을 잊지 마시구요.
신입생 여러분, 해방 후 최초의 민족사학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우리학교의 교훈인 以校爲家 事必歸正(학교를 내 집같이 여기고 행동하면 모든 일이 바르게 돌아간다)을 가슴에 새기며 대학생활을 한다면 4년 후에 여러분은 더 강해질 것입니다.
사회에 나가 당당하게 ‘나는 북악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자신을 만들어 가기를 바랍니다.
우리학교가, 우리학교가 ‘왕입니다요∼’
박철형 기자 / ≪국민대신문≫ 2007-12-04
국민대와 함께한 성곡동산 24년, 북악인의 안식처로 자리매김
지금은 1만 북악인에게 휴식처를 제공하는 성곡동산이 故 성곡 김성곤 선생의 묘소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성곡동산은 동산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성곡 선생의 호를 따온 것. 75년 2월 25일 별세한 당시 쌍용그룹(본교 재단) 회장 故 省谷 김성곤 선생이 본교의 후원(後苑)에 안장되면서 무명의 동산은 이름을 지니게 되었다.
미망인 故 명원 김미희(당시 본교 재단이사) 여사가 81년 별세, 합장되면서 묘소는 거의 성역화 되었다. 이후 9년간의 꾸준한 이장 계획으로 성곡 선생, 명원 여사의 묘소가 84년 5월 18일 대관령부근으로 이장되면서 동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2014년 10월 묘소는 대구 달성군 구지면 선영으로 이장되었다.
동산은 83년 여름 폭우로 인해 한 차례 무너지는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이장 이후 당시 교내 휴식 공간 부족 문제와 맞물리면서 큰 이슈로 떠올랐다. 그러나 묘 이장 후 1년 이내에는 그 묘지를 다용도로 사용하지 않고 보존한다는 한국전통관례와 그린벨트 등 여러 제약에 묶여 성곡동산의 활용계획은 더디어만 갔다. 하지만 그린벨트가 완화됨에 따라 북악인의 의견수렴을 바탕으로 계획안이 구체화되면서 성곡동산은 변모하게 된다. 즉, 작은 공간, 시설 등을 잘 활용해야 한다는 북악인의 의견이 동산을 진정한 휴식처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특히, 지난 93년 교상인 용두리가 성곡동산 아래에 위치함으로써 자연의 공간과 학교의 상징물이 어우러진 명소로 자리 잡았다. 한여름 시원한 폭포수를 내뿜는 용두리와 시원한 산바람의 성곡동산이 휴식의 장이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당시까지만 해도 성곡동산은 야외수업이나 일부 연인들의 전유물이었으나 벤치와 나뭇등걸이가 세워짐으로써 더 많은 학생들을 손짓하였다.
지난 94년에는 성곡동산의 언덕 면에 철쭉을 심어 봄이면 더욱 화사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색색별로 심어진 철쭉은 주말에 교정을 찾은 지역민이나 동문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특히 며칠 전 모 방송국 촬영 때 교내에서 가장 화려한 자태를 뽐내는 성곡동산의 화단 앞에서 촬영이 이루어져 전국에 성곡동산의 화려함을 선보였다.
국민대의 새로운 명소로 각광받고 있는 성곡동산, 성곡동산이 21세기에도 국민대의 명소, 자연과 인간의 연결고리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모든 성원들의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이 필요하다.
최대현 기자보 / ≪국민대신문≫ 2007-12-12
600호(1993.4)에서 699호(1993.3)까지 100호 간의 학보 발자취
국민대학보는 1948년 12월 18일 첫 발걸음을 내딛고 북악과 함께 700호의 역사를 기록하였습니다. 그 동안 학내 다양한 행사부터 학사행정, 학교의 변화까지 무수히 많은 사건들을 소중히 활자화 하였습니다. 그중 93년 4월 6일 600호에서 지금까지의 1면 탑기사를 통해 학보의 발자취를 살펴보려 합니다. 언제나 학보를 애독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새로운 역사 만들기에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편집자글>
1. 학교가 변했어요. 얼 만큼? 이 만큼!
우리학교의 자랑, 성곡도서관 자료동 사용은 6년 전부터였다. 그리고 각 건물들의 신·증축으로 1년 내내 공사장이라는 학생들의 불만도 있었지만 학교의 외형이 과거에 비해 많이 성장한 기간이었다.
· 중앙도서관 자료동 오늘(10일) 개관 - 완전 개가제 운영·17일부터 도서대출증 발급(제603호 93.5.10)
· 4호관·본관·공학관 증축공사 진행-12월 완공예정…일부 수업 차질 우려(제607호 93.8.23)
· 학내 개·보수, 신축공사 ‘한창’-5호관 신축공사 마무리…형설제, 강의실, 연구실로 활용
· 중장기 시설확충 계획안 발표 : 73계단 경사면 6호관(현 국제교육관) 신축, 연구실·대강당 사용(제660호 96.5.6)
2. 99학년도 등록금 동결이 있기까지 매년 새 학기 학내 화두가 되었던 등록금 인상!!!
94학년도 등록금은 15% 인상되었으며 이에 대해 등록금 책정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 95학년도 등록금이 2월 4일 계열별 평균 14.17%의 인상률로 최종인상안이 결정되자 총학생회는 학교당국의 등록금 인상이 부당하므로 인상률을 조정하여 등록금을 내릴 것을 요구하며 등록금투쟁을 전개해 나가면서 대자협 건설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학교당국과 학생회 간의 대화에 의한 동결이 아니라 나라 전체의 IMF 영향으로 99학년도의 등록금이 동결되었다.
· 94년 등록금 : 인상안 논의할 협의체 구성 필요-학교당국…15%인상 학생측…예산편성 타당성에 초점(제619호 94.1.1)
· 등록금인상률·예산안 공개여부 놓고 이견-학교당국·총학생회, 수차례 면담 결론 못내(제635호 95.3.6)
· 총학, 8일 학원자주화 투쟁 선포식 가져-‘예결산 공개’, ’학부제 반대’ 등 요구사항 전달(제656호 96.3.11)
· 지난 29일, 총장실 점거 농성 들어가 : 학생처장, “학생신분으로선 도저히 용납안 될 일” 총학생회, “요구안 수용될 때까지 투쟁결의”(제658호 96.4.1)
3. 대학에 대한 공권력 탄압
96년 한총련 사태 이후 학생운동에 대한 공권력의 탄압이 심해졌다. 이를 반영하듯 8월 26일 새벽, 우리학교 총학생회실을 비롯하여 현대과학, 탈, 우리역사연구회 등 학생회관과 2호관의 모든 과·단대 학생회실에 경찰의 압수수색이 있었다.
· 공권력 과잉집행, 비판 여론 높아 - 학내·외 구속·수배자 속출…우리학교 6명 구속·수배(제644호 95.6.12)
· 경찰, 학내 압수수색 - 학생회관에 있던 8명 강제연행, 북부총련 사무실 강제 폐쇄(제664호 96.9.9)
4. 개교 50주년 학보에 기록된 역사를 살펴보면…
개교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5월에는 신익희 선생에 대한 세미나, 각종 학술 강연회 등이 지속적으로 진행되었으며 박물관에서는 ‘설촌고문서’를 개교기념 행사에 맞춰 발행했다. 그러나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96년 10월 2일 대운동장에서 개최된 ‘KBS 열린 음악회’였다.
· 개교 50주년 기념 열린 음악회 개최- 자봉단 모집 등 준비 활발, 3만 관중 예상 ‘차 없는 날’ 설정(제665호 96.9.23)
5. 97년은 드·디·어 우리대학이 대외적으로 우수한 평가를 받아 위상이 향상된 해!!!
전국 대학을 종합 평가하는 대종평에서 본교가 우수대학으로 평가받았다. 이어 중앙일보 ’97 전국대학평가에서 우리학교의 ‘산업디자인’과 ‘기계계열’의 우수성을 인정받았으며 전국대학정보화 평가에서 한양대, 한국과학기술원 다음으로 당당히 전국 대학정보화 랭킹 종합 3위를 차지하는 영광을 안았다.
· 본교 이공계 교육여건 ‘우수’ 평가 - 교육부 국감자료에서 나타나…실험설비확보율은 최고 평점(제613호 93.10.25)
· 대종평 결과-‘우수대학’평가 - 연구결과 지원, 사회교육 강점, 대외협력, 전임교수 확보 개선점(제673호 97.3.31)
· ’97 대학정보화 랭킹평가 : 우리대학 종합 3위(제682호 97.11.3)
· ’97 교육개혁추진 우수대학 재정지원 사업-우리학교 정보화 최우수대학 선정, 연이은 쾌거(제683호 97.11.24)
6. 우리학교가 대내외적인 종합대학으로서 성장할 수 있기까지는 학사행정의 변화가 뒷받침되었다.
· 자연과학대학, 전산과학과 신설 - 교육부 94년도 입학정원발표…본교 280명 증원, 법학과·토목환경공학과·금속재료공학 등 야간 3개과 신설(제609호 93.9.6)
· 95학년도 입학정원 320명 증원 – 과학사회학과(야간) 신설·회계정보학과 등 명칭 변경(제631호 94.9.12)
· 97학년도 입시요강 확정 : 학부단위 모집, 매스컴 전공 신설 - 특차 상위 10% 이내 성적자 정원 34% 선발(제666호 96.10.18)
· ’99학년도 모집단위별 입학정원 확정 : 야간 540명, 주간으로 전환(제693호 98.11.9)
· 구조개편·도약2000, 오는 3월부터 본격 시행 - 구조개편-학생생활서비스센터 구축, 입시전략·발전전략 부서 신설 도약2000-학생들의 자발적 참여 활발히 유도될 예정(제696호 99.1.1)
대학보도 / ≪국민대신문≫ 2007-12-12
21세기 정보화사회 인재양성 으뜸대학 국민대학보
개교 52돌 맞아 명문사학 도약 국민대학교
창학 반세기. 올해로 개교 52주년을 맞은 민족사학 국민대가 21세기 정보화사회를 향해 힘찬 도약을 하고 있다. 열린 교육과 대학정보화를 앞세워 세계속의 명문대학으로 거듭나기 위해 비상의 나래를 활짝 펼치고 있는 것이다.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선생이 1946년 서울보인상고 교실을 빌려 해방후 최초의 민족사학인 「국민대학관」을 개교한것이 오늘날 국민대의 모태. 2년 뒤 서울 종로구 창성동 새 교사로 이전하면서 「국민대학」으로 교명을 바꿨다. 교훈은 「이교위가(以校爲家)」. 학교를 집같이 여기며 효친, 진실, 헌신의 정신으로 학문을 연찬하라는 의미이다.
해공선생의 갑작스런 서거와 한국전쟁등으로 한때 존폐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1959년 쌍용그룹 창업자인 성곡 김성곤(金成坤) 선생이 국민학원 재단을 인수, 발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1971년 현재의 북한산 기슭 정릉캠퍼스로 학교를 옮기면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 1981년 종합대로 승격했다. 현재 13개 대학원, 11개 단과대, 17개 학부, 47개 전공, 12개 학과에 1만2천5백명이 재학중이며 지금까지 4만2천6백99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지난해부터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130학점으로 낮춰 학생들이 다양한 학문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한 학생이 2~3개 학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도록 「다전공제」를 시행중이다. 전공이 소질·적성에 맞지 않을 경우 2학년 말에 정원의 10%이내에서 원하는 학과·학부로 바꿀수 있는 「전과·전부제」도 시행, 호응을 얻고 있다.
국내·외 대학과의 교류도 활발하다. 졸업학점의 25%까지 타대학 취득학점을 인정하고 있고 미국 아이오와 대학 등 8개국 23개 대학과 자매결연협정을 맺고 학생 및 교수교류, 어학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디자인, 기계·자동차공학, 경영정보, 지도자훈련 및 시민교육 전문프로그램 개발 등 4개분야를 특성화 분야로 선정, 집중 육성하고 있다. 기계·자동차 협정을 체결, 공동연구와 연구인력 상호 교류를 하고 있다. 지난 5월에는 산학협동 지원의 일환으로 기아자동차로부터 자동차 관련 실험·실습 기자재를 기증받았다.
공업디자인학과는 국내대학중 최고 수준. 지난해엔 일본전기주식회사(NEC)로부터 지원금을 받고 산학협동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특히 NEC 본사에서 이례적으로 학생들의 출품작을 전시, 화제를 모았다.
21세기형 인재양성을 선도하는 대학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학사·교수·시설투자 등 전 분야에 걸친 야심찬 중·장기 종합발전계획을 수립, 시행중이다. 이 계획에는 디자인·자동차·정보통신분야에 대한 특성화 정책의 지속적 추진, 「사제동행 프로그램」과 「문하생제도」등 교수·학생간 유대강화 방안. 캠퍼스 공원화, 원스톱 서비스 구축 등 「21세기형 대학」으로 가기 위한 모든 내용이 망라돼 있다.
신입장학금·재학생장학금 등 50여종의 각종 교내·외 장학금이 있다. 연간 전교생의 33%에 해당하는 5,400명이 35억원의 장학금을 지급받고 있다. 특히 교내환경개선 및 교내행정간소화 관련 아이디어를 낸 학생 본인을 근로장학생으로 선발하는 「학생자원 근로장학금」제도는 다른 대학도 앞다퉈 이를 채택하는 등 주목을 받았다.
다양한 분야의 평가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다. 작년에는 「98교육개혁추진 우수대학 선정」「97전국대학평가 조형대(디자인)전국랭킹 3위」「97전국대학평가 공과대(기계·자동차) 서울소재대학 랭킹5위」등의 실적을 올렸다. 96년엔 「96대학종합평가 우수대학」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입시특집 / ≪국민대신문≫ 2007-12-26
건학이념과 육영이념 정립하여 새롭게 도약해야
자부심과 긍지를 갖자
국민대학교가 개교한 지 50년이 넘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아직도 국민인으로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지 못한다고 하는 사실이다. 이는 아마도 국민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의 빈곤에서 연유하는 바 클 것이다.
해방 직후인 1946년 9월 1일 해공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건국강령에 입각한 교육균등의 원칙 아래 설립된 "국민의 대학", 그리고 미군정의 대학교육 장악정책에 따라 추진된 국대안에 대항하여 건립된 첫 민족대학으로서 국민대학은 탄생의 역사적 의의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교육은 물론 그러한 사실조차 국민인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실정이다. 국민대학에 입학하여 과연 누가 학교를 설립한 해공과 학교를 오늘의 모습으로 키운 성곡에 대해 공식적으로 교육받은 일이 있는가. 왜 세워져 있는지 의미도 모른 채 지나치는 해공의 동상이 고작이고, 성곡에 대해서는 성곡도서관이 있을 따름이다.
따라서 건학 반세기를 넘긴 지금의 이 시점에서, 그리고 대망의 21세기를 눈 앞에 둔 이 때에 해공의 건학이념과 성곡의 육영이념을 되새겨 본다. 그것도 두 분의 생애사, 즉 삶의 궤적을 통해 추출해 보고자 한다. 그럼으로써 전체 국민인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확립하고, 민족 민주 발전과 국민대학교의 새로운 도약의 전망을 세워보자.
해공의 생애
해공은 1894년 6월 9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성장기 해공은 현실개혁을 지향하던 가전의 학풍인 양명학을 익혔고, 1908년에는 관립 한성외국어학교 영어과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그리고 조국이 식민지가 된 뒤인 1912년 와세다대학에 입학한 해공은 독립운동에 전위가 될 유학생들을 결속시키고 민족의식을 배양하는데 주력하였다. 특히 1913년에는 동지들과 단지하여 피를 나누어 마시면서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고 하니, 이 당시 해공의 민족독립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17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한 해공은 귀국하여 중동학교와 고려대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곧 교수직을 버리고 민족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3·1운동 중 서울역 앞 만세시위를 배후 조종한 뒤, 3월 19일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여기서 해공은 4월 13일 독립운동의 통할 지도기관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는데 동참하였다.
이 때 해공은 임시헌장 기초 심의위원과 임시의정원법 기초위원이 되어 군주제를 청산하고 민주공화제 정부를 만든데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후 해공은 1920년대 초반 정부 각료 및 임시의정원 부의장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초기 임정의 기틀을 마련하고, 참여 세력의 분열과 갈등을 해소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1922년 2월 초 태평양회의와 극동인민대표회의에서의 독립 외교운동이 별 다른 성과 없이 끝나자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임정을 개편하자는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이 때 해공은 의정원회의에서 독립운동세력의 통일을 위한 국민대표회의를 가능한 빨리 소집할 것을 정부에 건의한 이래 줄곧 그 입장을 견지해 갔다.
그러나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는 임정의 개편을 둘러싸고 개조파와 창조파의 갈등이 첨예화하더니, 결국 독립운동세력의 대립만 격화시킨 채 결렬되고 말았다. 이에 해공은 임정을 통한 독립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무력투쟁을 한중 합작으로 실현하기 위해 섬서성 독군 호경익의 고문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해공은 한국과 중국의 청년 학생들을 모집하여 항일 유격대로서 분용대를 조직한 뒤, 국내 진공작전계획을 진행시켜 갔다. 하지만 1924년 가을 해공의 후원자인 호경익이 갑자기 사망하고, 중국 정부 또한 자국의 혁명에 주력하여 한중합작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수행하려던 계획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후 해공은 민족대당을 건설하여 항일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 전개해야 한다는 주장을 선도하면서 1932년 남경에서 한국혁명당을 창당하였다. 이를 중심으로 해공은 1932년 11월 상해에서 민족협동전선체인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이 동맹은 가맹단체 간의 연락 협의기관으로 일종의 단체연합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그 결속력과 통제력의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해공 1933년 말 자신이 속한 한국혁명당을 만주 한국독립당과 합쳐 신한독립당을 창당하고, 이를 매개로 기존의 독립운동 정당과 단체를 해소하여 단일대당을 창당하는 방식의 민족통일전선 형성에 진력하였다. 그 결과 1935년 7월 남경 금릉대학에서 좌우합작으로 민족혁명당을 결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 분열되었으므로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독립운동세력은 두 갈래로 대일 항전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는 1937년 8월 우익단체 중심의 광복전선 결성이었고, 다른 하나는 같은 해 12월 좌익단체 중심의 민족전선 결성이었는데 해공은 여기에 참여하였다.
이같은 분립 상황을 타개하고자 두 계열의 중심인 김구와 김원봉은 1939년 5월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을 공동으로 발표하여 통합의 길을 열었다. 그리하여 8월 27일부터 기강에서 통합회의가 개최되자 해공은 민족전선측 대표로 참석하였지만, 통합을 이루어 내지는 못하였다.
때문에 해공은 민족전선의 무력인 조선의용대가 있던 낙양으로 가서 이들을 지도하였고, 이들이 1941년 봄 연안으로 이동할 즈음 중경 임시정부로 돌아왔다. 중경에서 해공은 1942년 6월부터 임정의 외교연구위원회, 1943년 4월부터 선전부의 선전위원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44년 5월 임정의 좌우 연립내각 성립 때에는 내무부장에 선임되어 활약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2월 2일 환국한 해공은 모스코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결의되자 임정의 내무부장으로서 김구주석을 도와 반탁운동을 선도하였다. 이와 함께 1946년 9월 국민대학을 설립하여 민족국가 건설의 동량을 육성하는 한편 ‘자유신문’을 발행하여 민족 자주성을 함양하여 갔다.
그리고 1948년 5월 제헌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경기도 광주에서 당선된 뒤, 초대 국회 부의장·의장으로 활동하면서 대한민국 건국과 발전에 힘썼다. 이후 이승만 정권이 독재화하여 가자 해공은 민주당을 창당하여 반독재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나아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이승만 독재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다가 1956년 5월 5일, 호남선 열차 안에서 뇌일혈로 급서하였다.
성곡의 생애
성곡은 1913년 8월 15일 경북 달성에서 태어났다. 이후 대구로 이사 와 1928년 달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 휘문고보에 입학하였다가 대구고보로 전학하였다. 그러던 중 1931년 11월 대구고보 4학년 때, 성곡은 일인 교사 배척운동을 주도하여 퇴학당한 경험이 있다. 이로 보아 성곡 또한 일찍부터 항일 민족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물론 이 시기에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이 더욱 악랄해지면서 한국인 학생들 사이에 그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고, 그것은 또한 1929년 11월에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던 광주학생운동의 여파로 더욱 상승하던 때였다.
따라서 성곡도 대구고보가 일제의 공립학교라 더욱 철저하게 이루어진 식민지 교육에 대한 민족적 불만과 분노를 가지고 있었고, 이를 일인 교사 배척운동으로 표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성곡은 사립 보성고보에 편입하여 졸업한 뒤, 1934년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하였다. 보전 재학 시기 성곡은 ‘학교의 잔디밭에서 잡초를 뽑는’ 인촌 김성수를 보면서 그의 인격과 실력양성론적 사고에 감화되었던 것 같다.
때문에 “나도 장차 이런 육영사업을 해보겠다”고 다짐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것이 훗날 국민대학 인수의 한 동기였던 것 같다. 하지만 성곡을 사로잡은 것은 이 시기 청년 학생들에게 반일·반제의 이념으로 풍미하고 있던 사회주의사상이었다.
그같은 유물론적 사고는 성곡으로 하여금 물적 토대를 중요시하는 생각을 갖게 하고, 나아가 기업을 일으키게 한 원동력으로 보인다. 성곡이 해방 직후 사회주의 성향의 경북인민위원회 재정부장으로 활동하다가 고초를 겪은 일, 그리고 박헌영의 아들을 맡아 키우고 있던 공산주의자이자 승려인 한산스님을 물심양면으로 도운 일 등이 좋은 예이다. 보전을 졸업한 뒤, 성곡은 1939년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를 설립하면서 영남지방의 신흥기업인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특히 1945년 일제의 패망과 조국 광복은 성곡이 기업인으로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하 일본인이 독점 경영하던 비누제조업이 해방으로 중단되고, 비누 수입조차 허용되지 않아 삼공유지는 큰 호황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성곡은 1948년 방직공장인 금성방직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또 6·25전쟁의 어려움 속에서도 1952년 동양통신사를 창설하고, 1954년 연합신문사를 인수하여 언론사업에도 진출하였다. 그리고 1958년에는 자유당 공천으로 경북 달성에서 4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나갔다.
다음해인 1959년 성곡은 해공 사후 재단분규에 휩싸여 있던 국민학원을 인수함으로써 국민대학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 때 성곡은 국민대학 인수 요청을 받고, “해공이 남긴 것은 그것 하나밖에 없는데”하면서 쾌락하였고 한다. 이는 평소 해공에 대한 존경심과 반독재 민주화를 이루지 못하고 영면한 데 대한 아쉬움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성곡은 국민대학 육성을 통한 인재 양성, 1965년 성곡언론문화재단 설립을 통한 언론인 연수 지원, 1968년 성곡학술문화재단 설립을 통한 학술연구 지원 사업을 벌여 자본의 사회 환원과 교육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여 갔다. 다른 한편으로는 1962년 쌍용양회공업주식회사의 설립과 확장 사업을 통해 사회 간접자본의 확대와 국가 기간산업의 육성에도 심혈을 쏟았다.
1963년 11월 성곡은 경북 달성·고령에서 민주공화당의 공천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국회 재정경제위원장으로도 피선되어 경제개발정책을 국회 차원에서 지원하여 갔다. 특히 민주공화당의 재정위원장으로 임명되어 1971년 10월 정계에서 은퇴할 때까지 당의 살림살이를 챙겼는데, 이들 또한 성곡이 물적 토대를 중시해 온 처신의 결과로 생각된다. 성곡의 뛰어난 점은 그것이 비록 좌절하고 말았지만, 박정희 이후를 준비한 점이다.
1969년 9월 변칙적인 삼선개헌의 국회 통과와 그에 따라 실시된 1971년 4월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가 당선된 직후부터 그 이후를 준비하여 갔다. 그 때 성곡이 생각한 것은 독재의 가능성이 항존하고 있던 대통령중심제 정부가 아니라 의회중심의 내각책임제 정부로 생각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시험해 본 것이 1971년 10월 2일 오치성 내무장관 해임안의 처리 문제였다. 성곡은 이를 통해 의회가 행정부의 시녀가 아니라 실질적이고 주체적인 운영논리를 가진 국민의 대표기관이자 헌법기관으로 최고 집권자에게 새롭게 인식되기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성곡의 의도는 장기집권욕을 가진 박정희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고, 결국 그로 인해 정계에서 은퇴하게 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성곡은 다시 산업의 현장으로 돌아가 중공업 육성과 수출 진흥을 통한 물적 토대의 확대에 노력하다가 1975년 2월 25일, 62세를 일기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국민인의 재도약을 위한 제언
우리가 본 해공은 민족 민주운동의 화신으로 평생 그것을 실천하여 온 분이다. 그리고 성곡은 조국과 민족의 물적 토대 확립을 위해 헌신한 분이다.
이러한 점은 국민대학의 50년 역사에 비추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해공은 국민대학의 혼이고 성곡은 국민대학의 육신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혼이라고 하더라도 건강한 육신없이는 꽃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국민대학에 대한 두 분의 공적이 많고 적음을 평가하는 일은 무의미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들의 건학정신과 육영의 토대를 본받아 그를 더욱 확대하고 재생산하는 일일 것이다. 그럴 때에 국민인으로서 자기 정체성이 확립되고, 자부심과 긍지가 자연스럽게 부상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가장 좋은 기회를 맞이하고 있다. 해공 이후 처음으로 정통성과 당위성을 지닌 국민대 경영자를 가진 것이다.
잘 알다시피 현승일 총장은 경북고 재학 중, 1960년 2월 28일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자유당 정권이 정·부통령 선거 유세에 학생들을 동원하여 부정선거를 획책하는데 항의하여 시위를 벌였던 2·28민주 학생운동의 지도자였다.
그리고 1964년 6·3운동 당시에는 군사정권이 추진한 굴욕적인 한일외교회담에 대한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던 민족적 학생 지도자였다.
그에 대한 성가는 이미 민족 민주운동 선상에서 검증된 바 있고, 또 성곡과는 동향이며 후학으로 그의 토대론을 신봉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그것은 현총장 취임 이후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고 있는 국민대의 모습과 교육환경의 개선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해공의 정신과 성곡의 토대 위에서 자기 정체성과 민족 민주의 발전 전망을 가진 진정한 국민인, "국민의 대학"으로서 국민대학이 거듭 태어나야 할 것이다.
특집기사 / ≪국민대신문≫ 2007-12-28
‘녹색캠퍼스 운동’에서 ‘캠퍼스마을 만들기’로
2003년 <국민대신문>에서는 녹색캠퍼스 운동을 연중 캠페인으로 진행했었다. 당시 윤호섭, 이창현, 전영우, 전용일, 조중빈, 한경구 교수가 뜻을 모았고, 학보사의 윤정국 편집국장이 솔선수범해서 캠페인을 벌였다. 윤호섭 교수는 매번 <국민대신문>에 전면 광고를 디자인해줬고, 이것은 대학신문 차원의 우수한 공익 캠페인 사례로 기록됐다.우리학교가 차 없는 캠퍼스로서 학생들이 자유롭게 아스팔트길을 활보할 수 있는 것도 이 캠페인 운동에서 비롯된다. 이와 함께 ‘숲과 함께하는 캠퍼스’, ‘재활용하는 캠퍼스’, ‘물을 사랑하는 캠퍼스’등 다채로운 운동이 진행됐으며, 이를 계기로 ‘북한산과 녹색캠퍼스’라는 교양과목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과목 수강생들은 5인 1개조로 녹색전사단을 만들어 캠퍼스내의 다양한 환경운동을 수행했다. 이러한 활동은 ‘녹색캠퍼스를 꿈꾸며(이크, 2004)’라는 책으로 엮어, 국민대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기록됐다.
이 책의 서론에는 “녹색캠퍼스 운동은 생명의 운동입니다. 북한산에 둘러싸인 국민대학교에서 탄생한 녹색캠퍼스 운동은 캠퍼스를 푸르게 가꾸는 것은 물론이고, 캠퍼스 구성원들을 녹색 지식인으로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쓰여 있다. 녹색캠퍼스 운동이 주변의 수려한 자연환경을 자산으로 녹색 지식인 양성을 교육 목표로 삼았다는 것이다. 대학은 자연환경에 영향을 받지만, 주변마을의 공동체와도 영향을 주고받는다. 학생들은 주변지역에서 하숙 생활 또는 통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공동체의 문화를 만들어간다. 그렇기에 대학 주변의 마을은 자연스럽게 ‘대학촌’으로 불리었고, 그곳에서 대학생들은 주민과 함께 지역 문화를 꽃피워왔다.
그런데 학교 주변지역의 현재 상황은 어떠한가? 도시기반 시설은 낙후했고, 지역사회 공동체의 문화예술도 찾아보기 힘들며 구성원 간 연대도 사라졌다. 정릉3동은 재개발의 열망 때문에 주변 지역주민이 반목했고, 재개발이 연기되면서 지역 환경은 더욱 열악해져갔다. 그러다 보니 우리학교 학생들도 이곳을 외면하게 됐다. 대학생들도 개강파티 등 학교 행사가 있을 때만 이곳에 가고, 평소에는 친구들을 만나러 시내로 나간다. 대학생 없는 ‘대학촌’이 돼버린 것이다. 학교 앞의 대학촌이라고 할 수 있는 속칭 ‘지하마을’은 작명부터가 으스스하기까지 하다.
‘지하마을’까지 녹색캠퍼스 운동의 정신이 확산돼 새로운 차원의 캠퍼스마을이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10여년 전에 녹색캠퍼스 운동을 시작했던 것처럼 이제 캠퍼스 주변의 마을 만들기를 시작하면 어떨까? 정릉지역은 서울시 가운데서도 특히 낙후했기 때문에 도시재생이 필요한 곳이다. 그리고 성북구에서도 대학주변지역의 지구단위계획을 시도하고 있으니 우리학교도 이러한 계획을 수립해야할 것이다. 그러려면 구성원들이 캠퍼스내의 단독 발전만을 고려하기 보다는 주변지역과의 상생 발전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사실상 지자체에서는 다양한 재생 사업과 지역문화 활성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우리학교의 많은 교수들도 이미 다양한 지역의 사회복지 및 문화예술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한 역량을 기반으로 교수와 학생들이 함께 대학마을 만들기에 동참한다면, 지자체와 함께 하는 도시재생의 대안적 모델을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학생들은 더 좋은 주거환경을 얻게 될 것이며, 지자체의 사회복지 및 문화예술 활동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녹색캠퍼스를 꿈꾸며’의 추천사에서는 “탐욕과 이기주의와 천민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악취 속에서 국민대학의 녹색캠퍼스가 꿈꾸는 미래는 우리의 희망이다. 그 속에서 자라나는 녹색지식인들의 활약이 기대된다.”라고 쓰여 있다. 이러한 추천자의 제안처럼 이제 우리학교의 ‘녹색캠퍼스 운동’이 대학의 담장을 넘어 대학과 지역이 상생하는 ‘캠퍼스마을 만들기’로 이어지기를 바란다.
사설 / ≪국민대신문≫ 2015-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