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대학은 그동안 다년가의 숙원인 교지의 확보와 신교사의 건축에 착수하게 되었다. 우리 국민대학이 현 위치에서 수업을 시작한지도 이미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현 교사는 도심에 위치한 관계로 교통 기타 여러 가지 편리한 점도 없지는 않으나 무엇보다도 큰 결점은 교지가 협소하여 교사의 확장이나 학교 운동장을 확보할 여지가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 대학은 수년래 타처에 적당한 교지(校地)를 물색하게 되었고 마침내 정릉동에 적지를 얻어서 교지의 확보를 보게 되었다. 정릉의 신교지는 뒤로 준수한 산악을 지고 앞으로 시가를 내다 볼 수 있는 구릉으로서 정지와 운동장 등의 설치에 불소(不小)한 비용이 드는 것이 단점이기는 하나 그 반면 변화 있고 다양한 대학의 건설에는 매우 호적한 여건을 구비한 곳이기도 하다. 원래 대학은 아름다운 자연 속에 위치하는 것이 이상적인 것이라 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수려한 산악과 굴곡 있는 계곡과 구릉이 많은 본 대학 교지는 이를 십분 살려서 설허(設許)하고 꾸민다면 이상적인 학교가 될 것은 틀림없다.
현재 정릉에는 우리 대학 교사 제1호관을 건립하기 위하여 3천여 평에 달하는 정지공사가 완료되었고 미구에 건축에 착수하리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우리 대학 이 정릉으로 완전히 이사하기 위해서는 제1호관과 같은 규모의 교사가 두동 이상은 있어야 할 것이고 장래에는 본관, 대도서관, 체육관 등 10동을 넘는 건무들이 있어야만 한다. 원래 대학의 건설이란 그 내용이 시대와 사회의 발전에 따라서 무한히 생성 발전해야 하는 것이므로 그 건설도 무제한으로 계속되어야할 성질의 것이므로 건설에는 종료라는 시점은 없다. 다만 모든 대학은 그 시대 사회가 당면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시설을 갖추어 교육활동을 계속하는 것이 현실의 대학의 본무(本務)라고 할 것이다.
확실히 현재 위치의 우리 대학의 교사는 너무나도 비좁고 운동장이나 기타 대학교육에 최소한도로라도 필요한 제시설(諸施設)이 매우 빈약한 실정에 있는 것만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하루빨리 넓은 자연 속에 충분한 교사가 마련되고 기타수업과 연구 자아도치에 필요한 시설이 완비되어야만 한다는 것은 우리들 모두의 가장 큰 숙원의 하나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그러한 시설이 마련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며 비록 오늘은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 속에서 모든 불편을 참고 있기는 하지만 내일에는 기어코 이 희망은 이루어져야만 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물론 교육이 환경이나 시설만으로서 잘 되고 못 되고가 결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교육에 필요한 최소한도의 시설만은 그것 없이는 참되고 올바른 교육을 할 수가 없을 것도 부인할 수 가 없는 엄연한 사실에 속한다.이제 우리는 먼 장래가 아닌 가까운 내일에 우리의 새로운 배움터가 훌륭하게 마련될 희망을 품고 있다. 적어도 현재보다는 월등하게 좋은 시설을 갖춘 신교사에서 수업과 연구가 추진되는 날이 멀지 아니하다는 희망을 가지고 오늘의 불편과 부족을 참아 나가고 있다.
우리는 현 시점에서 스스로 반성하고 다짐하는 바가 있어야 할 것이다. 좋은 대학이란 교사나 시설만 좋으면 그로서 이룩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에 우리들 스스로가 수업에 충실하고 연구와 독서에 전력을 다하는 참된 대학생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냉정히 재자각(再自覺)해야만 한다. 교양에 관한 또는 전문분야에 관한 알뜰한 독서나 연구는 물론이고 수업에 마저 착실하게 출석하지 아니하고서야 어찌 참된 대학생이라 할 수 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우리들 스스로가 알차고 참된 대학생이 되는 것이 급선무이고, 또 그러한 연후에 부족한 시설이나 불충분한 환경이 풍족하게 이루어졌을 때에 우리들의 기쁨은 한결 큰 것으로 될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우리의 신교사가 재단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수재방조(袖才傍組)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힘과 정성을 모아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에는 적극 참여함으로서 우리의 희망을 스스로 달성하는 자세를 갖도록 해야만 한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는 우리 대학의 새 역사(力士)의 창조에 우리들 스스로가 참가하는 기쁨을 누릴 수가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설 / ≪국민대학보≫ 1969-05-29
역사 깊이 보기
교사(校舍)의 신축과 우리의 희망
「리포트」 학점으로 얼룩진 4년
뭔가 채 간직하기도 전에 피폐하고 초췌한 모습으로 긴 그림자를 이끌고 쫓겨 간다. 4년이라는 기간 동안 학원(學園)의 소요(騷擾)-비정상 방학-Report로 점철된 속에서 어디에 보람이 있었던가 골몰히 생각해 봐도 막연한 생각뿐이다. 있어야 할 젊은 날의 낭만과 기개 대신에 캠퍼스에는 낙엽이 이 구석 저 구석으로 뒹굴고 언제 방학이 되어야 하는지, 언제 강의가 시작되어야 할런지도 모른 채 책상위에는 Report의 홍수장이 되고 말았던 대학 4년의 길고 괴로운 막은 내린다.왜 남들은 세계 속의 대학이며 대학생의 가야 할 길이 이거라고 외칠 때 학교는 문을 닫고 나는 자부하지도 외치지도 못했고 뭔가 생각할 여유도 사태의 추이도 주시하지 않은 채 귀중한 것을 거부하고 내쫓힘을 당해야만 했는지 모르겠다. 세칭 시쳇말로 ‘얘기가 되지’라는 말이 머리에 남는다.
어떤 사실이든지 그것을 합리화시키려 하면 언어의 기술로써 모든 것을 일단(그 사실이 옳든 그르든 간에) 얘기가 되는 듯이 보인다(적어도 눈에 들어오는 확실한 물질을 제외하고서는). 지식을 축적한 자들은 자기 행동의 합리화를 위해서 자기보다 지식의 축적의 크기가 작은 자들에게 흔히 언어로써 설득을 가한다.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설득 당함’이지 결코 ‘인격적 수긍’은 아니다. 또한 그 가치 없는 지식의 축적으로 인한 언어의 술수로써 설득을 가한 자는 ‘지식 있는 사람’에 불과하지 결코 ‘양식 있는 지성인’은 못된다.
적어도 학문의 전당에 만큼은 ‘지식이 있는 사람’ 그 사람만이 존재하게 되고 ‘어쩔 수 없는 설득 당함’만이 학생이 가질 수 있는 최상의 미덕(美德)이라는 풍조는 사라져야 한다. 어떻게 하면 하루가 무사(無事)와 안일(安逸)로써 지나가느냐 하는 식의 사고가 존재하는 한 그것은 기간의 사장(死藏)이지 보람의 창조는 아니다. 비록 어찌할 수 없는 외계의 힘이 가해온다 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진리탐구라는 대학의 사명을 미리 기피하고 보잘 것 없는 어떤 것에 대한 욕심으로 급급한다면 어떤 이유와 언어)의 술수를 가지고서도 그 비굴함과 사명에 대한 기피가 훗날 정당화 되지는 못할 것이다.굳게 닫힌 교문이 열렸다고는 되어 있으나 강의는 부존재(不存在)한 모순이 꼭 계속되어야만 했었으며 강의도 없고 시험도 없는 상태 속에서 원고용지에 의한 학점이나 주고받는 것 등이 연례 행사화 되어 버린 우리 세대의 대학생활의 숙명(?)에서 탈피 할 수는 없었던 것일까. 무언가 두려워하고 ‘타부시(視)’하기 이전에 충분한 대화와 학문에 대한 추구열을 함께 할 수는 없었을까?
우리에게는 보석 밀수를 하고서도 구속집행정지처분을 받을 기술(?)도 없고 신성한 법정에서 법관에게나 증인에게 칼을 휘두르는 정도의 만용도 없고 국민정서생활의 향상과 학생들의 학습에 도움을 주겠다는 명목 아래 사슴이나 사자 등을 사들일 외화를 구경조차도 할 수 없고 실내에 수영장과 에스컬레이터까지 시설한 아방궁을 소유할 재벌도 못되고... 이런 것은 공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학생이니까 역시 공부, 공부만 해야 한단다. 그 어떤 귀중함에 대한 의구와 갈망의 미완성은 훗날의 숙제로 남겨둔 채 학점 얻는 기술(?) 덕분에 신(神)의 보호하심 덕분에 교문을 나서게 되었다. 봄이 되면 북악의 상쾌한 풀내음도 가을만 되면 으레 주인공이 된 캠퍼스의 낙엽들도 심오한 진리 앞에 우매한 우리를 깨우쳐 주기에 열변을 토하시던 H교수님의 강의와도 헌신적으로 격려를 아끼지 않던 K양과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우리의 조그만 소리를 대변해 주었던 대학보(大學報)와도 이젠 조용히 「아듀」를 고할 순간이다. 닫혀 있는 싸늘한 철문 앞에서 시집살이 끝에 돌아 온 자식을 내쫓으며 닫아버린 친정집 대문을 연상하며 눈물짓는 가련한 모습도 비정상방학과 기약 없는 개강일자와 리포트와의 기막힌 숨바꼭질도 가슴에 박힌 커다란 멍으로 남겨 둔 채 말이다.
신순호(법학 4)동문 / ≪국민대학보≫ 1975-01-13
길을 묻는 이 있거든 북악(北岳)을 바라보게 하라
76년도를 맞으면서 본교는 대학교육내용의 질적인 향상과 내적인 충실을 기하기 위한 몇 가지 획기적인 방안을 수립, 이를 이번 학기부터 실시하고 있다. 그 하나가 강의시간의 50분단위화이며, 다른 하나가 강의계획서제(講義計劃書制)의 활용이다. 전자는분명 교육형식에 관한 문제이며, 후자는 분명 교육내용에 관한 문제이다. 여기서 확인되는 것은 형식적이건 내용적이건 어떠한 측면에서도 교육의 허실화를 인정치 않겠다는 학교당국의 단호한 의지이다. 학문의 상아탑으로서의 대학사명에 관한 한 이들이 가지는 의의는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학문의 현장을 떠난 곳에서, 그리고 그 속에서의 인격체의 성장과 성숙을 도제(挑除)한 곳에서 대학은 존립의 여하한 의의도 찾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50분 강의제 효율적인 운영이 해결해야할 과제로 남기는 한다. 가령 소단위 강좌의 경우 문제는 없겠으나 대단위 강좌의 경우, 교수 입실 시간과 출석 점호 시간을 제할 경우, 실제 수업시간은 40분이 채 안될 수도 있다는 점, 강의가 무르익어 본격화되려고 하다가 중도에서 끝나야 한다는 아쉬움 같은 점, 수강생들의 질문이나 토론이 결국에는 시간적으로 어떤 한 시간 혹은 두 시간이 중복되어 듣고 싶은 강좌를 듣지 못하게 된다는 점 등이 앞으로 연구되어야 할 문제들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러한 난점은 집약적인 강의방식, 호명 이외의 출석체크 방법의 개발, 시간표 작성의 기술적인 문제들이 해결, 강구된다면 100분이나 150분 강의를 계속하여 학생과 교수가 모두 지쳐버리는 폐단과 비능률을 지양하고 새로운 학풍을 수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해도 무방할 것이다. 실라버스제는 예년에도 실시되어 오던 것이나 실험대학 인가와 더불어 강화된 것이다. 이번 학기부터는 이를 복사, 학생들에게 배부함으로써 수강생들로 하여금 교수지침이나 교수요목을 숙지케 하고 이를 예습이나 복습에 이용케 한 것이다.학기말에는 학생들도 참석한 평가회에서 그 성과와 문제점 등을 반성할 기회를 갖는다고 한다. 계획이 모든 일의 성패를 판가름 한다면 이는 교수계획 자체의 미비에서 오는 강의의 부실을 최대한 줄여 보자는데 그 근본취지가 있다고 하겠다.그러나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수업을 담당하는 교수 측에서의 문제이지, 수업을 받는 학생 측에서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강의시간을 쪼개고 아무리 강의내용이 충실하다고 하여도, 이를 받아들이는 학생들이 자기성장의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이 모든 것은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평범한 진리이지만 또한 절실한 것이기도 하다.학기 초 본교는 국내외 석학들을 초빙하여 교수진을 대폭 보강함으로써 어느 대학에 못지않은 강팀의 교수진을 확보하고 있다. 이들을 좋은 의미에서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전적인 책임은 오직 학생들에게만 달려 있는 것이다.더욱이 경계해야 될 것은 학업태도의 형식화이다. 타율속의 창조는 창조가 되지 못하며 진정한 의미의 성장은 자기발견의 내적성찰을 통해서 이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수업시간에 주어지는 과제물이 형식화하고, 강의도서(講義圖書) 독후감 제출이 형식화할 때 그것은 곧 수업에 임하는 자세나 그 인생전체 까지도 형식화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물론 남에게서 주어지는 것만을 받아들인다고 하여 대학생활이 성공적인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학은 분명 그 이상의 것이며, 인생도 역시 그 이상의 것이다. 단지 여기서 우리는 어떠한 이름으로도 학구적인 태도의 불성실과 태만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사실만을 재확인하고자 할 따름이다.
우리는 도서관의 모든 책들이 학생들의 손때로 더렵혀지기를 원하며 도서관의 서가가 학생들이 빌려간 책으로 텅 비게 되기를 원한다. 또한 책을 사달라는 요구와 성화가 다른 어떠한 요구보다도 빗발치기를 원한다. 「이교위가(以校爲家)」곧 학교를 집으로 삼아 생활하고, 도서관을 공부방으로 생각하고, 운동장을 앞마당으로 생각하고 젊음과 정열을 불태워 줄 것을 희망한다. 그 때 우리는 어느 시인의 글귀를 다음과 같이 고쳐 말할 수 잇을 것이다. 즉 「길을 묻는이 있거은 북악(北岳)을 바라보게 하라」
사설 / ≪국민대학보≫ 1976-03-31
만학(晩學)의 변(辯)
내가 대학, 그것도 장안(長安)의 명문인 국민대학에 발을 들여 논 때는 내 나이 30을 훨씬 넘어서다. 1955년, 아직 6.25의 총성이 귀에 쟁쟁하게 울려오는 전후(戰後)의 일이다. 그때만 해도 아직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기 전이어서 군인인 나로서는 전열을 재정비하고 전후복구사업에 매진하는 것이 더 중요한 임무의 부하(負荷)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것만으로써는 만족할 수 없는 한 정열이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향학열이었고 젊은이와의 허심탄회한 대화의 그리움이었다.
젊음과 낭만과 배움. 그것은 긴 인류의 역사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하나의 진리요, 불변의 함수관계였다. 하지만 내 연배의 많은 젊은이들은 불행히도 이와 같은 특권(?)을 누리지 못한 채 쓰디 쓴 전쟁의 과중에 휩쓸려야만 했다. 일본 식민통치하의 2차 대전이 그 하나였고 6.25동란이 또 다른 하나였다. 그리하여 내 연배의 대부분은 젊음도 낭만도 배움도 송두리째 전쟁터에 묻어 버리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 그렇다고 하여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시들어졌을까? 젊음에 대한 향수가 사라졌을까? 오히려 이런 것들이 우리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이에 대한 정열은 더 뜨거워졌고 그것이 내 나이 30을 훨씬 넘어서야 대학의 문을 두드리게 한 결심을 굳혀 준 계기였다.
돌이켜 보면 일본 식민지하의 36년 동안 우리는 너무나도 잃은 것이 많았다. 조국과 자유와 젊은 등 온통 빼앗긴 것뿐이었다. 만주로 남양(南洋)으로 그리고 북해도(北海島)로 일본 군국주의 쇠사슬에 끌려 다니면서도 우리가 잃었던 그 모든 것을 되찾으려 발버둥 쳤었다.연합군과의 싸움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방탄조끼 노릇을 하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것을 찾으려고 애태웠다. 그러다가 1945년, 조국광복과 함께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도 열망했던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되찾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을 누리는 것도 잠깐이었다.우리가 찾은 자유와 평화, 젊음과 배움을 채 꽃피우기도 전에 우리는 조국의 분단과 동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또 다시 젊음과 낭만 그리고 배움을 송두리째 빼앗겨야만 했다. 오직 자위(自慰)의 변(辯)이 있다면 자유와 평화 그리고 조국수호의 긍지였다고 자부하는 것이다.이처럼 나의 세대는 조국의 비극적 운명과 부침(浮沈)을 같이 했으니 설사 학문적 기반이 약한 만학의 길이었을지라도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가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내 세대의 비극적 배경 속에서 잠시의 평은(平隱)을 틈타 시작된 배움의 길은 결코 평탄(平坦)하지만은 않았다. 무엇보다도 어려웠던 것은 오래 쉬었던 학문(學問)의 길에서 새로운 학문(學問)의 물결을 헤쳐 가는 것이었다.사실 당시의 국민대학에는 나와 같은 만학 내지 노학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모두 하나 같이 배우고자 하는 의욕은 대단했지만 대부분의 만학들은 직장을 가지고 있거나 군 복무중이어서 생소한 학문인데도 불구하고 정열을 다하여 열심히 공부했다.이처럼 만학에다 군 복무중의 배움이라 어려움은 많았지만 못 배웠던 공부를 한다는 사실은 늘 나 자신을 즐겁게 해 주었다. 그렇지만 당시에도 과도기에 학교에 다닌 학우 (學友)들이나 요즈음의 젊은 학생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오히려 사소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 대신 대학에 다니는 것은 출세나 치부의 길이어야 한다고 믿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의 만학의 길에서 대학이 결코 출세나 치부(致富)의 왕도는 아니지만 우리가 일생을 통하여 다시 찾을 수 없는 젊음과 낭만과 배움을 주는 장소임에는 틀림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내 어찌 이런 것을 가볍게 여기겠는가? 이런 점에서 볼 때 나의 국민대학은 나에게 참 인생을 되찾아 준 영원한 은혜요 진리의 상(像)이었다.
이제 우리 국민대학이 새 교사를 짓고 교세를 확장하여 숱한 영재를 길러 내면서 하루하루 발전하는 모습을 보니 내 비록 만학의 길은 걸었지만 그 때 우리 국민대학 동창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자부심과 깊은 애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다시 한 번 나에게 새로운 삶의 뜻을 일깨워 준 모교의 영원한 발전이 있기를 빌면서 만학의 변(辯)에 가름하고자 한다.
전부일(정치학과 10회, 1959)동문 / ≪국민대학보≫ 1976
창성동에서 정릉동으로
국민대학교가 현재의 정릉동 캠퍼스에 둥지를 튼 것은 약 30년 전인 1971년 9월의 일이다. 해방 직후인 1946년 9월 확고한 재단 없이 개교한 국민대학교는 마땅한 교사를 구하지 못하고 여기저기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1948년 2월 종로구 창성동에 식민지 시대의 체신이원양성소 건물을 미군정으로부터 불하받아 어렵게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 창성동 캠퍼스는 신 교사를 준공, 증축하는 등 1,200여 평의 교지에 2,000여 평의 교사를 갖게 되었지만, 종합대학으로의 승격을 꿈꾸며 본격적인 발전을 꾀하는 데는 그 규모가 너무 협소하고 학교 위치 또한 적당하지 못한 것이었다. 날로 팽창하는 학생 수에 비해 공간이 너무 좁았고, 학교 주변이 모두 주택가이며 바로 앞이 중앙청의 후원인 경복궁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교지를 확장할 수 없는 곳이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종합대학 승격과 도약을 위한 학교발전계획은 캠퍼스 이전 사업에 의해 구체화된다. 학교법인은 수년간에 걸쳐 새 캠퍼스 자리를 물색하기 시작했는데, 다음과 같은 교지 선정 요건을 정하였다.
즉 ① 거리는 도심지에서 가까운 곳이어야 하며, ② 주위의 환경은 자연미를 살려 꾸밀 수 있는 곳이어야 하고, ③ 면적은 장래의 발전을 기약할 수 있는 넓은 곳이어야 한다, 는 것이었는데, 이에 적합한 장소로 현재의 캠퍼스가 자리 잡고 있는 정릉동 일대가 낙점된 것이다.현재의 상황에서 이들 요건의 적실성 여부를 생각해 보면, ①은 회의, ②는 만족, ③은 불만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 이유는 ①의 경우 거리는 중심에서 가까우나 교통이 편리하지 못한 데에 있으며, ②는 수려한 자연 친화적 환경을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기에, ③은 그린벨트에 묶여 개발이 제한받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한편, 학교법인 국민학원은 1965년부터 교지 매입에 나서 1968년 6월 제1호관(현 본부관) 교사를 기공하여, 2년 3여 개월만인 1971년 9월 총 1,501평의 철근 콘크리트 5층의 현대식 건물을 준공하였다. 또한 같은 날 당시로선 초고층인 15층의 제2호관(현 북악관)을 기공했다. 이어 1971년 9월 초순 창성동에서 정릉동으로 캠퍼스를 이전함으로써 역사적인 정릉동 캠퍼스 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인왕산 자락에서 23년 동안 갖은 시련과 수난을 극복하며 성장해 온 국민대학교는 새로운 희망과 포부를 안고 북악 기슭에 옮겨와 그를 하나 둘 이루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김동명(정치외교학과)교수 / ≪국민대학보≫ 2003-01-01
우리학교 축제의 연원과 변천
이번 주는 우리학교의 축제인 ‘대동제’가 치러지는 주간이다. 교정 곳곳에는 5월의 싱그러움과 함께 온통 활기가 넘쳐난다. 축제는 흥겨운 문화 행사인데 그 가운데 지성의 전당인 대학에서의 축제는 대학문화의 꽃이다.
1966년에 처음 열린 우리학교의 축제는 이후 40여 년 동안 다양하게 변천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창학 이후 시련을 겪어야 했던 우리학교는 개교 20주년 만에야 축제를 개최할 수 있었다. 이때는 봄에 ‘국민축제’가, 가을에 ‘동백축제’가 열렸다. ‘동백축제’는 당시 우리학교 병설로 설립된 국민여자초급대학의 축제였다. 국민여자초급대학은 존폐의 기로에 섰던 우리학교가 새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1961년 5·16쿠데타와 함께 소위 ‘대학 정비’의 선풍 속에서 우리학교는 폐교의 위기를 맞이했다. 존폐 위기에서 어렵사리 야간부를 살린 우리학교는 폐지된 주간부 대신 국민여자초급대학을 1962년에 설립했고, 대학정상화에 힘을 쏟아 1964년에는 다시 주간부가 부활되었다. 그리고 1965년 2월에는 중앙농민학교를 인수하여 교세를 확장하였다.
첫 축제가 열린 1966년은 그런 점에서 우리학교가 위기를 극복하고 비로소 대학다운 규모와 체계를 이룬 시기였다. ‘동백축제’는 1967년 국민여자초급대학이 폐지되면서 1968년까지 3회 열리고 마감되었다. 1969년부터는 중앙농민학교를 개편한 국민산업학교의 축제인 ‘인왕제’가 1971년까지 ‘국민축제’와 함께 열렸다. ‘인왕제’는 체육대회를 비롯한 꽃꽂이 전시회·음악감상회·인왕싸롱의 개점·페스티발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진행하였다.
1971년 9월 정릉동으로 이전한 뒤, 1972학년도부터 국민산업대학이 우리학교 산업학부로 개편되면서 두 갈래로 열리던 ‘국민축제’와 ‘인왕제’는 ‘북악제’로 통합 개칭되면서, 축제 행사가 더욱 번성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북악’이란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후 봄에 열리던 축제는 1976년부터 개교기념일에 즈음한 가을 행사로 바뀌었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통일분위기가 한껏 고조되던 1987년에는 ‘북악통일한마당’으로 이름 했다가, 1994년부터 ‘대동풀이’로, 1996년 개교 50주년을 맞이해서는 ‘북악 한마당’의 이름으로 축제를 열었고, 1997년 이후 축제 기간을 다시 봄으로 옮기고 ‘대동제’로 정착되었다.
북악 구성원이 공동체로서 하나됨 뿐 아니라, 갈등과 반목의 질곡을 뛰어넘자는 민족의 염원도 함의한 ‘대동제’의 의미처럼 우리학교의 축제가 더욱 성숙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장석흥(국사학과)교수 / ≪국민대신문≫ 2003-05-19
제2창학의 보금자리인 정릉동 시대를 열다
국민대학이 창성동 교사에서 정릉동으로 이전한 것은 1971년의 일이었다. 국민대학은 초창기 어렵사리 창성동 교사에서 보금자리를 틀었으나, 재단분규로 휩싸이며 침체기를 거쳐야 했다. 1959년 성곡 김성곤 선생이 국민대학을 인수하면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 갔으나 어려움 또한 적지 않았다.
1961년 박정희 정권 당시 공포된 ‘학교정비기준령’에 의해 국민대학은 협소한 교지와 빈약한 교육여건으로 폐교지경에 이른 적이 있었다. 국민대학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1962년 여자초급대학을 병설하고, 1964년 주간부를 부활하며 내실을 다져나갔다. 아울러 종합대학 승격의 걸림돌이었던 자연과학대학, 공과대학 설립과 대학설비기준령에 부합하는 교지와 교육설비에 힘을 기울였다. 1965년에는 중앙농민학교를 인수하는 한편, 새로운 교지 물색에 힘을 쏟았다. 중앙농민학교를 농과대학으로 승격시키려는 노력은 뜻대로 이뤄지지 못했으나, 교지 확보 노력은 계속되었다. 처음에는 양재동 말죽거리 일대 100만평을 매입할 계획이었으나, 시내와 너무 떨어져 있어 학생 모집에 어려움이 예상되어 포기하고 말았다.
그때 후보지로 거론되었던 곳이 오늘날 정릉동 캠퍼스 부지였다. 원래 이곳은 대한유도회가 1964년 올림픽에서 최초로 메달을 획득한 것을 기념하는 회관을 짓기 위해 정부로부터 불하를 받은 곳이었다. 이곳은 도심지에서 근거리에 위치하며, 북한산의 자연미를 살릴 수 있는 수려한 주위환경, 장래 발전을 기약할 수 있는 배후지로서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재단 측은 정부와 유도회 측과 막후접촉을 거쳐, 1965년 159평의 부지를 매입한 것을 시작으로 1968년 2차로 2천7백여 평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건축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다. 창성동 교지를 처분하면 해결될 수 있었으나, 당장 학생들의 교육이 중단되어야 하므로 그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청와대에 인접한 창성동 교사는 건축 제한지역으로 묶여 있어 거래에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나 재단 측은 정부와 끈질기게 교섭하여 부지 대금 3억 5천만 원을 선금으로 전액 받되, 교지는 정릉동 캠퍼스 건물이 준공되는 1년 6개월 후에 비워준다는 유리한 조건으로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1969년 7월 정릉동 부지에 착공의 첫 삽을 뜬 이래 1971년 9월 본부관이 준공되면서 국민대학은 정릉동 시대를 열게 되었다.
요즘 국민대학은 7호관(가칭)과 지하주차장 건설 공사로 부산하기 그지없다. 지하주차장은 지상 녹색캠퍼스와 맞물려 변화할 캠퍼스의 모습을 기대하지만, 다른 한쪽에선 공사가 끊임없다는 볼멘 목소리도 들린다. 그러나 정릉동으로 이전한 이래 30여 년 동안 우리 국민대학은 끊임없이 발전하여 ‘세계 속의 웅비’를 외칠 만큼 성장한 것이 사실이다.
이계형(박물관 특임교수) / ≪국민대신문≫ 2003-09-22
우리 대학의 또 다른 이름 “북악”을 돌이켜보며
우리에게는 ‘국민’이란 이름 말고 ‘북악’이란 또 다른 애칭이 있다. 북악관·북악체전·북악학우(인)·북악문화상·북악가족 한마당 등이 그것이다. 이는 경복궁의 주산(主山)으로 지금은 청와대를 두르고 있는 북악(342m)에서 이름한 것이다. 백악(白岳)이라고도 불렸던 북악이 우리 학교와 관련해서는 창성동시대부터이다.
예전 창성동 교정은 경복궁을 우로 두고 청와대로 가는 길목에 위치(현재 정부합동청사)하고 있어, 북악과 인왕산을 뒤로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학교는 두 산과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었을 뿐 아니라, 경무대나 청와대가 주인격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학교가 드러내놓고 북악의 주인처럼 강하게 내세우지 못하였을 것이다. 더구나 창성동시대는 재단분규로 힘든 고비 고비를 넘어야 했으며, 성곡의 재단 이후에는 종합대학 승격이라는 절대명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주변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그럴 여력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 재학생이나 동문들은 항상 북악과 인왕산의 위엄과 정기를 머금고 함께 호흡하였다. 당시 우리의 북악인들은 ‘국민축전’이라 일컬었던 축제를 ‘북악골 흑마들의 잔치’, ‘북악골 누빈 성화의 제전’이라며 북악골 우리 대학의 위상을 제고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북악에서의 4년’이라는 회고의 글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국민산업대학의 축제를 ‘인왕제’라 하였다는 점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학보에 ‘북악상록(北岳想錄)’이란 고정칼럼이 실린 것도 ‘북악’에 대한 애정 어린 마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북악’이란 이름이 북악인 모두에게 회자되는 것은 정릉시대를 맞이하면서다.
우리 학교는 창성동을 떠나 정릉골의 현재 이곳, 청룡처럼 뻗은 북악산의 동쪽줄기 자락으로 옮겨온 뒤로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우선 국민대학과 국민산업대학의 이원체제로 운영되어오던 것이, 비로소 일원체제로 재편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하였다. 우선 학보의 ‘국민만평’이 ‘북악만평’으로 바뀌었으며, ‘북악만필’이란 코너가 만들어졌다. 이는 축제에도 반영되어 ‘국민체전’이 ‘북악제’로 탈바꿈하여 새로운 출발을 보였다. 이어 북악극회, 북악방송국 등 ‘북악’이 또 다른 하나의 호칭으로 부각하였다. 1974년도에 가서는 우리 성원 모두를 칭하던 ‘국민인’이 ‘북악인’으로 거듭났다. 그 뒤 ‘북악’이란 이름은 우리의 또 다른 의미로 다가왔던 것이다.
우리 학교를 휘감고 있는 북악산은 예로부터 그 지세가 밋밋하지 않고 굴곡이 심하다하여, 명당자리로 일컬어져 왔다. “이제야 국민대학이 북쪽 기슭에 제자리를 찾았으며, 앞으로 이곳에서 천하를 휘어잡고 호령할 인재가 배출될 것”이라는 풍수학자의 말도 들린다. 혹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세뇌되어 그저 잠룡처럼 살고 있지 않은지 한번쯤 돌이켜야 할 것이다. ‘북악’은 우리에게 4계절 바뀌는 모습으로 다가오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 우뚝 솟아 우리가 그곳에 서는 날까지 함께 할 것이다.
이계형(박물관 특임교수) / ≪국민대신문≫ 2003-11-24
대학 생활의 또 하나의 공간 동아리
신입생들의 웃음소리와 호기심 어린 눈빛에서 캠퍼스의 봄이 왔음을 일러준다. 대학생이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타율성이 많았던 형태의 생활에서 벗어나 보다 자율적인 삶의 시작을 의미한다. 특히 대학 동아리는 학생들 스스로의 참여로만 운영되는 모임이다. 때문에 학생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없으면 그 동아리는 없어지고 마는 것이 생리이다. 학기 초에 각 동아리가 다양한 행사를 개최하며 신입생들을 영입하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 학교에 동아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중반 경이다. 주로 학술·영어학습·문학·체육 관련 동아리가 만들어져 의욕적인 출발을 보였지만, 운영 미숙과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내지 못해 한 두 해 운영되다가 없어지고 말았다.
우리 학교의 동아리가 본격적인 궤도에 오른 것은 1970년대에 들어서다. 당시는 창성동 시대를 마감하고 정릉시대를 개막한 시기여서 학생 활동이 어느 때보다 활발하였다. 1971년 10개로 시작한 동아리가 1979년에 가서는 27개로 늘어나, 현재 우리 학교에 등록된 65개의 동아리가 가운데 41%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 더욱이 1978년 학생회관이 준공과 더불어 각 동아리의 활동공간이 마련되었던 것도 동아리가 활성화하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는 종교와 체육활동과 관련된 동아리가 강세를 보였다. 학생들의 다양한 요구와 사회적인 분위기에 발맞춘 것이다. 1982년 프로야구가 탄생하면서 대학가에도 야구 바람이 일면서 아마 야구반이 만들어진 것이 그러한 경우이다. 그 당시 주목되는 동아리로는 명운다회를 꼽을 수 있다. 1980년 12월 한규설 대감댁을 종로에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와 민속관을 개관한 다음해에 민속관내에 명운다회가 조직되어 차문화를 선도해 나간 점이다.
1990년대 들어서 다양한 동아리가 만들어졌지만, 예전만 못하여 9개에 그치고 말았다. 이러한 경향은 2000년대에도 이어지고 있다. 2000·2001년에 4개가 만들어졌지만, 2002·2003년도에는 새로운 동아리가 하나도 조직되지 못하였다. 양적인 팽창이 반드시 질적인 성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급변하는 사회에서 학생들의 다양한 요구를 받아들일 수 있는 다양한 동아리가 조직되어 학생들의 선택의 폭을 넓혀주어야 할 것이다.
또한 기존 동아리는 과거를 답습하는 차원에서 머물지 말고 새롭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동아리는 자기의 소질을 살리는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비전공 선후배들과 많은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공간이다. 동아리 활동이 학업 생활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새내기들의 많은 관심과 열정이 동아리에서 살아 숨쉬길 기대해본다.
이계형(박물관 특임교수) / ≪국민대신문≫ 2004-03-02
국민대 신문 60년 그 때 그 시절3
5월의 여왕 부제의 1973년 5월 30일자 신문(제156호)
최초의 메이퀸(May Queen)은 1908년 5월 31일 이화여대(당시 이화학당)에서 탄생했다. 메이퀸은 ‘여대생으로는 최고의 영예’였을 뿐만 아니라 축제의 꽃이었고 아름다움과 지성을 상징하는 대명사였다. 과마다 퀸을 뽑아 경합을 하여 메이퀸을 뽑았다. 대학 메이퀸의 영예는 굉장했다. 학생들이 “당신을 여왕으로 모십니다”라고 합창하면서 여왕에게 화관을 씌워주는 엄숙한 행사가 끝나면 일간지에까지 사진이 실려 유명세를 치렀다. 메이퀸은 점차 학교 대표 미인 선발대회로 퍼져 각 학교는 앞 다투어 성대하게 여왕 대관식을 치렀다.
우리학교는 1966년에 1대 국민여왕이 탄생했다. 축제가 4월 또는 5월에 열렸기 때문에 메이퀸보다는 ‘국민여왕’이라는 호칭을 썼다. 여왕 대관식에는 여학생들이 여왕을 위해 강강수월래 등의 축하무용 퍼레이드를 준비했다. 1970년 5월 5일자 신문에 ‘아리따운 본교 여학생들이 강강수월래가 있기 전 국민여왕을 향해 정렬하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다. 우리학교의 메이퀸 선발조건은 B학점(3.0) 이상, 키 160cm이상, 품행이 우수하고 용모가 단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73년 5월 30일 국민대신문에는 “8대 국민여왕으로 뽑힌 송인순 양이 전년도 여왕으로부터 여왕관을 물려받았다”는 기사가 보도됐다. 8대 국민여왕으로 뽑힌 송인순 양은 당시 의상학과 4학년이었다. 신문에는 그녀의 사진과 함께 인터뷰가 실렸다. 인터뷰에는 그녀의 가족관계, 출신 고교, 취미, 특기, 결혼상대자의 조건 등에 대하여 나와 있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송양은 장래 배우자 조건으로 건강, 성실, 학벌, 가문, 용모, 경제력 순으로 제시했는데 요즘 20대들이 경제력을 우선시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인상적이다.
국민여왕 대관식은 74년까지 이어져오다가 75년에 학도호국단이 결성돼 체육 부분에 역점을 두는 축제로 바뀌면서 국민여왕 대관식을 비롯한 문화·예술 분야의 행사가 제외됐다. 다음 해에는 축제가 아예 ‘춘계 북악 체전’으로 변경돼 국민여왕은 설 자리를 잃었다.
이화여대에서는 낭비라는 지적과 함께 성의 상품화와 평등권 위배로 논란이 되어 과에서 퀸을 뽑아 올리지 않으면서 78년에 메이퀸이 폐지됐다. 이제 메이퀸은 한때 유행했던 대학문화이기 보다는 잊혀져가는 축제의 낭만으로 기억되고 있는 듯하다.
강혜령 기자 / ≪국민대신문≫ 2008-0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