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12월 16일 박창서 동창회장 사무실에서 현 동창회 간부를 모시고 ‘우리대학의 어제와 오늘’이라는 제목으로 간담회를 열었다. 이날 참석하여 주신 분은 박창서 회장, 신유섭·박내윤 부회장, 이원재 문화부장, 최상수 사업부장, 최금옥 문화부 간사, 그리고 김호섭 선배님이시며 사회는 김병팔 편집국장, 기록은 박찬주 기자가 담당하여주었다.
사회 : 올 들어 제일 추운데도 이렇게 나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먼저 어언 개교 18년을 맞는 본 대학의 학풍에 대하여 1회 선배님이신 회장님부터 한마디...
박창서 : 글쎄, 매우 어려운 문제인데 학풍이라기보다 우리가 재학시절에 국내 사정과 그 물건을 말하고 우리 대학의 창학이념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1946년 12월 18일 사학으로서 정규 대학 인가를 국내 최초로 받은 대학이 우리 대학이라고 기억됩니다. 그 때는 일제에서 해방된 기쁨과 독립 국가를 건설하여 자유롭게 잘 살아보겠다는 ‘밝은 장래’에 전 국민이 의욕에 차 있던 때였습니다. 이런 사회적 풍속 속에서 상해에서 귀국하신 신익희 선생이 여신 우린 대학은 많은 공부하겠다는 젊은이가 끝없이 모여들었고, 그 학구욕은 중천 했었죠. 특히 1회는 야간대학으로 발족해서 그런지 새 나라의 새 일꾼이 되려면 실력을 길러야 한다는 학생 스스로의 자각으로 학습 분위기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정도였으니까요. 그래서 창학이념인 ‘새나라의 동량이 될 인재를 육성한다는 방침과, 완전 일치를 본 대학이었죠.
박내윤 : 그리고 엄격한 학사행정으로 이름을 날렸었고 의욕과 실력 있는 젊은이가 특히 우리 대학에 많았던 것은 초대 신 학장을 비롯하여 이사진의 정치적 각사가 별빛과 같이 빛나고 있어서 그 분들의 인격을 흠모하여 좋은 학생이 모여든 이유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신유섭 : 여하튼, 희망에 차 있었고 어려운 초창기지만 성실하게 면학했죠. 바로 어제 같은데, 감개무량합니다. 지금 후배는 그 때 비하면 그나마 훨씬 안정된 환경에 있다는 점을 잊기 쉽겠으나 그래선 안 됩니다.
최상수 : 신 국장님은 슬그머니 일침을 놓으시는구만요. 하하(일동 웃음).
이원재 : 망명 정부 요인이 돌아와서 무식하면 나라를 빼앗기니 가르치자는 뜻과 한국 백년대계를 위하여 언론을 창단하는 정신으로 국민대학을 설립한 것이라는 점을 말해두어야겠죠. 이 때 박 기자가 ‘후레쉬’를 터트려야지
신유섭 부회장님 왈 : 가만 계슈. 못난 얼굴이지만 그래도 잘 나와야지... 옷깃을 여미고 근엄한 표정!(일동 폭소)
사회 : 초창기의 생생한 말씀을 들으니 애교할 마음이 절로 우러납니다. 이렇게 훌륭한 인사가 만든 국민대학이 발전해 온 경로에 관해서 생각나시는 대로 한 말씀. 가장 먼저 세운 학교가 또 내적으로 가장 충실했으며 발전할 여건이 충분했다면 아직 단과대학으로 남아있는 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박내윤 : 다른 여건은 다 구비되어 할 수 있겠지만 불행히도 견실한 재단을 만나지 못하여서 한국에서 양적으로 크게 발전할 시기를 놓쳤다는 데 그 중대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돌아보면 수차 재단이 바뀌는 동안에 그 중에는 재원이라고는 전혀 없는(봉이 김선달) 같은 재단도 있었으니까요. (일동 잠시 폭소)
사회 : 제가 대학 4년을 다니면서 느껴왔고, 또 이 자리에서 말씀을 듣고 보니 그간 우리 대학을 이끄는 정신적 지주가 될 만한 헌신적인 교육자가 없었다는 것이 국민대학이 발전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재단이 자꾸 바뀌어 왔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말입니다.
최상수 : 여하튼 제가 54년도 고교를 졸업하고 국민대학에 응시할 때에는 경제과가 8 : 1, 정법과가 7 : 1인 치열한 경쟁을 보였다는데 참 좋은 때는 다 실기한 것 같습니다.
박내윤 : 그렇지만 불운 가운데도 반갑게도 현 김성곤 선생님께서 이끄신 재단이 들어서고는 밝은 전망이 보이니 기쁜 일입니다. 현 재단은 많은 출혈을 해가며 학교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소식이 들릴 때 마다 반가운 마음뿐입니다.
김호섭 : 현 재단이 국민대학을 인수할 때 동창회 학생들에게 학교를 발전시키겠다는 약속을 했던 것이 분명히 기억됩니다.
박내윤 : 종합대학으로 단시일 내에 발전시키고 대학 유지비로서 연간 구화 1억 환 이상을 출연하겠다는 확실한 답을 했습니다.
박창서 : 이 시점에서 학교가 발전하려면 정신적 자세와 재단의 강력한 뒷받침이 있어야겠는데, 학문적, 정신적면은 현 교·강사 및 동창회의 협조로써 장시간을 요하는 문제이겠고 재단과의 관계에서 현상 유지로서는 누구나 다 불만인 것이 사실이겠습니다. 동창회로서는 간부진만이라도 그 유곽 발전을 위해 비밀에 속할 문제는 알고 싶으며 좀 더 빨리 충실하게 해달라는 부탁과 협조를 해줄 것입니다.
신유섭 : 후배를 동창을 잘 이끌어주어야겠고 또 일종의 책임감도...
최호섭 : 현 재단에서 많은 일을 했죠? 들리는 바로는 중앙농민학교를 인수한 실적은 있었으니까요. 우리는 정신적으로 모교 발전에 기여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 선배님이 모교를 걱정하여주시는데 재학생으로서 참으로 마음 든든한 바 있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동창회는 실질적으로 어떤 사업을 계획하고 계신지요.
박창서 : 한마디로 동창회는 학교와 한 발자국 떨어져 있는 것이 우리 입장입니다. 학내 사정을 잘 아는 학생이나 교·강사 어느 분이라도 우리 동창회와 허심탄회 의논하여 준다면 고맙겠습니다.
이원재 : 모교 발전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으며, 따라서 관심을 가지며, 그 발전을 진심으로 희망하는 사람은 동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후배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사업을 추진하겠습니다.
박창서 : 그러나 ‘아웃사이더’가 또한 동창 아니오. 하하하.
박내윤 : 동창회의 운영에 있어서 기금 마련이 그 첫 번째 사업입니다.(폭소) 그리고 회장단의 일치단결로서 일하고 또한 관사를 두어서 운영의 묘를 얻겠습니다. 첫째로 기금이 되면 동창회 사무실을 마련하도록 생각중입니다. 그리고 금전에 관해서는 깨끗하게 하고 임기 중 무엇을 꼭 남기겠다는 것이 현 간부진의 통일된 의견입니다. 선후배의 상호구조의 기틀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이죠.
사회 : 최금옥 선배님께서는 아직 한 말씀도 안 하시고 계시는데.
최금옥 : 왜요. 저도 참고하고 있었답니다. 솔직히 학교에 대하여 재학 중에는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졸업기에 또는 졸업 후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더군요. 여기서 한마디 말씀 드릴 것은 국민대학에서 여학생을 우대하는 ‘젠틀맨쉽’을 좀 더 발휘하시기를 부탁드리자는 것입니다.
신유섭 : 과연 여성다운 말씀다운 말씀이시군(또 폭소)
사회 : 바쁘신 와중 이렇게 장시간 나와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후배와 모교를 위하여 많은 일을 해주시길 바랍니다.
국민대학보·편집부 / ≪국민대학보≫ 1965-1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