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사이버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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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1992 종합대학 승격과 중형대학, 종합대학을 이루고 내실 있는 견실한 중형대학으로 발돋움하다

  • 종합대학 승격에 즈음하여

  • 두 가지 풍경과 오해

  • 종합대학의 역사적 출범

  • 제4회 조형전(造形展)

종합대학 승격에 즈음하여

오늘 본인은 우리의 염원이고 숙원이던 국민대학교의 승격 보도에 접하고 이를 학생제군과 모든 북악인에게 알리면서 진심으로 경하하여 마지않습니다. 돌이켜보면 우리 대학은 해공 신익희 선생님의 건학이념과 성곡 김성곤 선생님의 육영이념으로 오늘의 발전이 거듭되었음을 상기할 때 새삼 흠모의 정을 금할 길 없습니다.이에 본인은 대학을 대표하여 이 기쁨을 두 영령(英靈)앞에 머리 숙여 아뢰고 유지를 받들어 훌륭한 대학교로 육성시켜갈 것을 다짐하면서 그 예지(叡知)에의 계시를 받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 대학은 웅비에의 역사적 전환점에 접어들었음을 자인(自認)하고, 우리 모두 새로운 각오로서 새 출발을 촉구해야 할 시점에 놓였음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학생제군!그동안 우리는 오늘의 승격을 진정으로 고대했고 학생제군의 열망 속에서 이를 창조함에 최선을 경주(傾注)해 왔습니다. 오늘의 성과는 결코 우연의 소산이 아니요, 오직 피와 땀으로 얻어진 노력의 대가이며 결실인 것입니다. 이 값진 대가를 얻음에 우리는 다시금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열리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진리와 역사의 필연은 발전이라는 귀중한 교훈을 이번 기회에 다시 한 번 체득(體得)한 셈입니다. 각고하고 노력하는 창조의 정신만이 광휘(光輝)로운 오늘을 약속한다는 이 진리를 재음미하면서 앞으로 우리 대학생이 해야 할 바가 무엇인가 그 사명과 의무의 중대함을 재삼 절감하는 바입니다. 우리는 오늘의 이 기쁨을 밑거름으로 삼아 끊임없이 현재적 입장에서 ‘나’를 조명)해 가되, 한국의 대학, 세계)의 대학으로 육성시켜감에 소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주지하는바 대학은 진리탐구의 도량이요, 고결한 인격도야의 수련장입니다. 새 시대의 역사적 다짐과 출발에 있어 우리 대학생이 맡은 바 그 임무는 실로 막중합니다. 학생 개개인의 면학은 곧 훌륭한 대학발전에의 발판이 되고, 다시 그 발판이 나라건설에 이바지 하는 원동력이 됨을 자각할 때 굳은 결의로서 스스로를 채찍질해가야 하겠습니다. 앞서 본인은 훌륭한 대학교로서의 육성을 다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의 다짐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옛말에 ‘천시불지인화(天時不知人和)’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모두가 본인의 다짐위에 인화(人和)로서 단결하고, 그 단결된 힘으로써 ‘불망구국(不忘救國)’의 애국정신, ‘이교위가(以校爲家)’의 애교정신으로 면학에 전념하는 실천궁행정신(實踐躬行精神)을 발휘 해야만 대학이 곧 국리민복(國利民福)으로 인도한다는 소기(所期)의 목적을 성취하리라 믿습니다. 이는 곧 우리의 실천적 목표로써 달성해야 할 지상과제이기도 합니다.

이를 지향함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한국인으로서의 투철한 국가관과 진리탐구라는 확고한 학문관의 함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국민대학의 역사적 이정표로 굳히고 계속 정비와 점검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면 우리 대학교의 웅대한 발전에 획기적 계기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리 모두 이를 위해 매진합시다.

서성택(제10ㆍ12대 이사장) / ≪국민대학보≫

1. 종합대학 승격(1981.3), 2. 서성택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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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풍경과 오해

편집장의 추억담

학생편집장으로부터 창간 60주년 기념호 원고 청탁을 받고 확인해보니 주간교수직을 맡은 것이 17년 전이다. 세월의 빠름에 내심 놀랐다. 1991년 1월부터 1993년 8월까지 주간교수직을 맡았다. 나뿐만 아니라 주간교수 누구나가 겪었던 당시의 일상과 고뇌를 기록으로 남겨두는 일도 필요하다는 생각에 기꺼이 청탁에 응했다.

두 가지 풍경

하나, 토요일 저녁마다 신문발간을 위해 들려야 하는, 을지로 3가의 학보사 인쇄소를 생각하면 아직도 그 때의 무거운 마음을 느끼게 된다. 당시 주간교수에게 주말 가족과의 단란함을 기대하는 일은 사치에 불과하다. 이곳에서 원고를 최종적으로 다듬어 실제 신문 크기의 대장에 옮겨 조판이 끝나면 주간교수의 OK 사인을 받아 학보가 발간된다. 자정이 넘어도 대장은 넘어오지 않는다. 썰렁한 인쇄소의 유일한 말벗으로 동고동락하던 당시 학보사 장상수 간사(현 교무팀 차장)에게 살짝 기자들의 작업장에 들려 동정을 캐묻게 한다. 그런데 아직도 기사를 작성중이란다. 젠장, 이럴 수가. 언제부터 준비한 기사가 아직까지도 작성중이란 말인가?

매주 목요일 주간교수는 학생편집장과 다음 신문 각 면 기사의 제목과 줄거리를 확정한다. 거기서부터 시작된, 제목과 줄거리를 적당히 하여 간섭을 받지 않으려는 기자들과의 실랑이가 이제 토요일을 넘기고 일요일 새벽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기자들은 원고를 움켜쥐고 주간교수가 지치기를 기다리면서 시간을 끈다. 우여곡절 끝에 대장에 사인을 하면 새벽 2시가 훌쩍 넘는다.

또 다른 하나, 수업과 관계없이 학보가 배포되는 월요일 아침이면 학교에 나와 불안한 마음으로 총장실의 전화를 기다린다. 총장실에 전달된 학보는 총장님이 마지막으로 OK를 해야 배포된다. 때로는 총장실에서 주간교수를 부른다. 왜 이런 기사와 사진을 싣느냐는 등 주문과 질책이 한 둘이 아니다. 주말, 인쇄소에서 기자들을 달래고 윽박질러 학보 만들던 수고를 누가 알아주랴. 총장실을 나서면서 눈물이 핑 돌 때도 있으나 하소연 할 곳도 없다. 홧김에 사표를 던진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당시 총장실 이영옥 비서(현 법인비서실 부장)가 팔을 붙잡으면서 참으라고 달래던 풍경이 눈에 선하다.

당시를 떠올리면 선명하게 떠오르는 잊을 수 없는 주간교수의 일상적인 풍경들이다. 왜 이러한 풍경이 당시에는 일상적이었을까? 지금은 학보 애독자 명부에서 사라졌다고 믿고 있지만, 안기부와 경찰 교육부 학사 담당관은 누구보다도 우리 학보를 하단의 광고면까지 샅샅이 애독해주던 귀한(?) 고객들이었다. 고객이 왕이라지 않는가? 고객의 지대한 관심(?)과 눈에 보이지 않은 주문이 두 가지 풍경을 낳게 한 근본 원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누구를 탓하랴. 그야말로 시절을 탓할 수밖에 없으리라. 1987년 6월 항쟁으로 당시 우리 사회 전반이 민주화의 길로 들어섰고, 이를 기화로 당시 대학신문이 학내 민주화의 주요한 소통수단의 역할을 했다. 특히 대학생들의 분신과 같은 희생이 뒤따르면서 학보에 대한 감시는 오히려 강화되던 시절이었다. 아마도 학내외 이슈를 선점하여 학내 여론을 주도하는 것이 대학신문의 정도라면, 1980년 후반과 1990년대 전반기는 대학신문의 황금기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두 가지 오해

이러다 보니 당시 우리 대학은 물론 각 대학에서 6개월짜리나 그 미만의 주간교수가 자의반 타의반 속출하던 때였다. 그에 비하면 나는 그 엄혹하던 시절 주간교수로서 2년 8개월을 생존했으니 크게 장수(?)를 한 셈이다. 그러다 보니 두 가지 오해를 받았다.

하나, 학생 기자들은 대체로 당시 주간교수를 권력기관에서 파견된 하수인 정도로 바라본다. 되도록이면 기사를 늦게까지 가지고 있다가 마지막에야 주간교수에게 보인다. 기사에 대한 간섭을 최소화 하려는 의도에서다. 기사 내용과 관계없이 자기들 입맛대로 기사 제목을 뽑으려 한다. 눈치싸움과 기싸움으로 주간교수와 기자 사이에 따뜻한 정은 찾을 수 없다. 인쇄소에는 다른 대학신문도 작업을 했는데, 주간교수가 화를 내어 자리를 박차고 집으로 가버리는 사태를 여러 번 목격했다. 그 때 차라리 나도 자리를 박차고 6개월짜리 주간교수가 되는 것이 기자들에게나 나 자신에게 훨씬 더 떳떳할지도 모르리라 생각한 적이 있다.

또 다른 하나, 대학 본부는 본부대로 주간교수에 대한 불만이 여간 아니다. 여과 없이 표현하자면 주간교수가 학생기자들과 한통속(?)이 되어 대학신문이 학생운동의 선전물(당시 표현으로 ‘프로파간다’라고 함)이 되었다고 질타한다. 대학신문의 품위가 크게 타락했는데, 그 원인의 하나가 주간교수의 소신과 분별없는 처신 때문이란다. 안팎곱사등이라는 말이 나에게 잘 어울리는 말이구나라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젊은 교수라 주눅이 들어 당시에는 할 말 하지 못하고 속을 썩다 주간교수로서 2년을 훌쩍 넘겼다.

주간교수직을 그만두고 연구년을 받아 미국으로 떠날 때의 홀가분함이야 누가 아랴. 그것은 달리 학보사와는 이제 영원한 이별이라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세월은 흘렀다. 주간교수를 귀찮고 성가신 존재로 곁눈질하던 기자들이 졸업 후 주례를 청탁하기도 하고, 가끔 연락을 하고 안부를 묻는다. 가슴 속에 쌓였던 두 가지 오해는 이로 인해 어느 사이에 눈 녹듯 사라졌다. 이 학교에 있는 한 이제 전직 주간교수라는 딱지는 뗄래야 뗄 수 없는 끈질긴 인연의 징표로 남게 되었다.

지금의 주간교수와 기자들에게 내가 겪은 두 가지의 풍경과 오해는 잘 이해되지 않을 것이나, 또 다른 그 무엇이 여러분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을 것이다. 잠시나마 지난 시절을 되돌아 보면, 맡은 일에 대해 사심 없이 최선을 다 하다보면 언젠가 오해는 사라지게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다. 그것은 지금의 여러분에게도 통할 수 있는 덕목이라 생각한다.

1991년 연말 학보사 축쇄판 창간호를 내고 겸하여 창간 43주년 기념 자축연을 했는데, 손님이 모두 우리 식구뿐이라서 정말 멋쩍고 당황스러웠던 일이 새삼스럽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으리라 장담한다. 국민대 학보사를 거쳐 간 수많은 주간교수와 학생기자의 땀과 열정이 어우러져 60번째 생일을 맞이한 우리 국민대학교 학보사에 대해 대견함을 느끼면서 다시 한번 축하의 인사를 올린다.

박종기(국사)교수 / ≪국민대신문≫ 2008-11-24

1. 1992년 필자가 학보원고를 정리하는 모습, 2. 박종기(국사)교수 1991년~1993년 주간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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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대학의 역사적 출범

개교 이래 30여 성상(星霜), 드디어 우리는 81년의 3ㆍ1절을 기점으로 우리의 숙원이던 종합대학의 역사적 출범을 맞이했다. 오늘부터 그 새로운 장을 기록하기에 이른다. 돌이켜 보면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선생의 건학정신과 성곡(省谷) 김성곤(金成坤) 선생의 육영정신은 이제 또 하나의 금자탑을 쌓았으니, 이 정신을 생명으로 이어받은 우리는 다시금 새 각오 새 결심으로써 면학에 임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원대한 목적과 현상은 종합대학의 간판을 얻는데서 달성되는 것만은 결코 아니다. 문제는 형식적 겉치레의 외실이 아니라, 알찬 학문을 통한 실력배양과 고매(高邁)한 인격도야를 완성하는 내실의 충실에 있음을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면학분위기를 조성하는 일이요, 그 터전위에서 학문을 탐구하고 인격을 연마하는 일이니, 이는 곧 대학생으로서의 임무요 사명(이 아닐 수 없다. 학생에게는 학생으로서의 본분이 있다. 그 본분은 대학의 질서를 존중하고 인화(人和)로 단결하면서 맡은 바 스스로의 학문에 정진하는 일이다. 

만에 하나라도 이에 탈선이 있다면 그것은 학문을 탐구하는 학도(學徒)라기보다는 학생이라는 미명하에 질서를 파뢰하는 집단에 불과할 것이다. 무질서의 집단은 한낱 사회의 공해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투철한 대학생관이 확립돼야 한다. 그저 그날그날 교문만을 출입하는 학생이라면 그것이야말로 퇴폐적인 추락자와 다름없다. 그로부터 우리는 내일의 희망을 찾아 볼 수 없고, 살았으되 죽은 자와도 같다. 퇴폐적인 추락에겐 생동하는 창조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종학대학의 출범과 더불어 한국 속의 세계대학으로 창조성장(創造成長)시켜 가야 한다. 학문과 인격으로서 이 원대한 과업을 성취시켜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사명을 짊어진다. 이를 스스로 자각 해야 한다. 때문에 밖으로는 재단·교수·학생이 삼위일체(三位一體)가 되어 상호신뢰의 바탕위에 인화로 단결하여 면학의 풍토를 진기(振起)할 일이요, 안으로는 이 풍토 위에서 불철주야 면학에 정진할 일이다. 그것만이 우리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는 첩경이니, 종합대학의 출범을 또 하나의 자성(自省)의 계기로도 삼아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진정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

시간은 결코 ‘나’를 위에 멎어주는 법이 없다. 쉬지 않고 흐르는 그 시간 속에서 진정한 ‘나’를 찾을 일이다. 그리하여 이제 우리는 종합대학출범의 경축에서 깨어나 진정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자각할 일이다.

사설 / ≪국민대학보≫ 1981-03-07

1. 1960년대 국민대 학생들이 종합대학 승격의 염원을 담은 국민만평(≪국민대학보≫ 1967.11.30), 2. '국민대학'현판을 떼고 '국민대학교'현판을 새롭게 거는 장면(19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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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조형전(造形展)

우리 대학교는 지난 11월 10일 오후 2시 한국디자인 포장센터의 대형전시장에서 조형 관계 분야와 이 계통의 대학에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제 4회 조형대학 조형전을 서성택(徐聖澤)이사장, 정범석(鄭範錫) 총장, 김수근(金壽根) 학장을 위시한 각계 저명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또한 KBS TV보도진의 촬영과 함께 화려하고 성대하게 개막하였다.회고하건대, 건축, 산업디자인(공업디자인·시각디자인), 공예(도자공예·금속공예), 의상분야의 학생작품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종합전시회를 개최한 것은 1976년 제1회 국민대학 조형전이었고, 이것은 그때부터 강한 이미지를 이 분야의 연구자들에게 주었던 것이며, 그 후 1977년, 1978년 3개년 동안 우리 대학의 조형전은 서울을 위시한 지방 주요도시를 순회하면서 국민대학교의 조형작품뿐만 아니라 우리 대학의 건실한 면학분위기를 올바르게 전달하는데 큰 몫을 다하였던 것이다.그 후, 조형학부의 학생들은 더욱 전공분야의 연구의 깊이를 더하여 금년에 조형대학으로 승격됨에 따라 네 번째의 조형전을 개최하기에 이르렀는데 그 규모에 있어서나 그 내용과 질에 있어서도 과거의 조형전보다 훨씬 나아진 명실공이 한국유일의 조형대학다운 수준이라고 평가하여도 결코 자화자찬은 아닐 것이다.

우리 조형대학이 이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학교당국이 적극적으로 성원해준 덕택이며 조형대학의 교수들의 열렬한 학생지도의 결실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 지면을 빌어 그간의 노고에 치하를 보내면서 다시 한 번 우리 조형대학의 특성을 여기에 피력함으로써 앞으로 더욱더 한국유일의 특성 있는 조형대학으로 발전하기를 기대한다.조형학부에서 조형대학으로 승격될 당시에만 해도 조형이라는 용어에 대해서 다소 생소한 느낌을 갖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조형이라는 용어가 생소하거나 전혀 새로은 신조어는 아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있어서는 1960년부터 국책(國策)을 공업근대화에 둠으로써 교육도 역시 생산적인 면을 강조하게 되었으며 예술 교육 역시 지금까지의 정서주의교육(情緖主義敎育)에서 생산주의를 강조하게 되었으니 이른바 일반미술교육에 있어서 그리기 중심의 교육보다 만들기 중심, 즉 실용미술교육을 강조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미술요과서 역시 이러한 교육이념에 따라 개편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은 만들기 중심의 실용미술의 흐름을 과감하게 예술교육에 도입한 것을 우리는 조형주의(造形主義) 미술교육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사회통념이 너무 순수미술 쪽의 예술관에만 습속화(習俗化)되어 조형적인 예술의 세계에 익숙해 오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지 이 용어 자체가 생소한 것이거나 신조(新造)한 것은 아니다.외국에 있어서 조형이라는 용어가 활성화한 것은 미술사나 또는 현대미학사(現代美學史)에 있어서도 그 뚜렷한 한 시대를 획(劃)할 수 있는 1920년대 독일의 바우하우스로 부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바우하우스의 공식명칭 가운데 게슈탈트(Gestalt)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곧 영어의 Shape, Form에 근사한 용어이며 나아가 Form-gebung(형태부여, 곧 조형(造形))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조형이론을 현대에 와서 재정립시킨 사람이 곧 전후(戰後) Bauhaus를 재건하려 했던 서독 ULM조형대학의 Max-Bill이었는데 그가 의미하는 조형관은 곧 오늘날의 예술과 기술이 결합함으로써 창조되는 문화는 곧 현대문화로서 이것은 곧 일상생활문화라고 규정하였던 것이다.다시 말해서 미르쿠제가 정의한 바 있는 정신세계로서의 브르조아 문화, 즉 일상적인 생존경쟁의 사회성의 세계와 본질적으로 다른 문화만을 문화라고 보는 편협한 문화관에서 진일보한 일상성에 초점을 맞춘 일상생활문화의 조형 형성이 곧 조형의 세계로서 이것은 오늘날의 산업기술과 오늘날의 인간의 창의력이 새로운 장에서 만남으로서 형성되는 새로운 풍경으로서 과거의 순수 미학에서 독립한 이른바 산업미학(産業美學)의 분야가 우리 조형대학이 연구하는 학문대상인 것이다.

따라서 이 기회에 우리 조형대학이 무엇을 연구하는 대학인가를 다시 한 번 기술할 필요가 있다. 현대 도시사회에 있어서 주택의 문제뿐만 아니라 도시환경에 이르기까지 urban planning, Landscape Architecture Interior extetior Architecture이 모든 것이 건축학과의 연구과제이며, 자동차에서 가전제품, 심지어 숟가락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일상 생활제품과 기계 기기의 제품개발은 공업디자인의 커뮤니케이션의 매체 제작와 정보의 해상력(解象力)을 기르는 시각디자인, 일상(日常) 도자공예제품에서 산업도자제품에 이르기까지 도자를 연구하고 금속제품의 개발을 연구하는 생활미술학과(공예학과), 의생활문제뿐만 아니라 의복 그 자체와 이에 관련되는 각종 패션을 연구 개발하는 의상학과, 이 모든 것은 상고 유기적(有機的)으로 관계있는 일상생활문화를 창조하는 분야의 학문으로서 지금까지의 미술대학이나 예술대학의 성격과는 다른 독특한 특성이 있음을 우리는 이제 제 4회 조형전에 나타난 학생들의 작품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다. 전시장에 출품된 작품도 곧 예술의 세계와 기술의 세계가 결합해서 창조해낸 진보되고 개선된 편리하고 아름다운 조형의 세계로서 새로운 일상생활양식(日常生活樣式)을 창조한 새로운 풍경인 것이다.

사설 / ≪국민대학보≫ 1981-11-16

1. 조형학부 작품실(1981), 2. 김수근 교수, 3. 제4회 조형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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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공선생 동상제막의 의의

  • 학보창간(學報創刊) 37주년을

  • 명원민속관과 한국의 茶문화

  • 1987년의 북악인은
    이렇게 생각했다

해공선생 동상제막의 의의

지난 7월 18일 서기(瑞氣)어린 북악(北岳)캠퍼스의 본관 좌측에 본교 창립자이며 위대한 정치가였던 고(故)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 선생의 동상이 제막되었다.

해공(海公)선생의 동상건립은 그동안 전 북악인의 숙원사업있던 바 늦은 감이 있으나 이 숙원이 이루어진 지금 고인의 업적(業績)과 유업(遺業)을 음미해보면서 앞으로의 좌표를 설정해 본다는 것도 중요하리라.

해공(海公)선생이 일본 제국주의(帝國主義) 통치하에서 후진 양성을 위한 교육으로 그리고 국권(國權) 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셨다는 것은 부인할 필요성이 없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특히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주조국(民主肇國)건설을 위한 기초를 다졌으며 해방 후에는 이땅에 민주주의 정착을 위하여 노력을 경주하셨음는 그의 위대한 정치적 업적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해공(海公)선생의 진면모는 그의 육영정신(育英精神)에서 찾아 볼 수 있겠다. 1946년 정치적 ㆍ 사회적 혼란의 와중에서도 역사를 계승하고 움직일 젊은 주역(主役)들에게 대학교육의 필요성을 깊게 느껴 해방 후 최초의 사립대학인 본교를 창립(創立)했다.

국민대학 설립 취지문에서 해공선생은 민생의 안정, 국력배양 등 제령역(諸領域)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 시급치 않은 것이 없으나, 특히 육영사업(育英事業)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건전한 정신(精神)과 이상(理想)을 배양하고 전문지식을 습득하여 국민대중(國民大衆)의 지도자(指導者)가 될 소질과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인재의 육성이 역사의 시행착오를 극복할 수 있는 길임을 깊게 동찰(洞察)하였음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해공(海公)선생의 육영이념(育英理念)은 개인의 성격을 통하여 사회생활에 이념과 양식(樣式)을 변혁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점에서 사회력이 되는 동시에 사회진보(社會進步)의 원동력이 될 것이며 심오한 국가적 관념(觀念)밑에서 국민의 생활력을 함양하고 국민의 문화를 향상 발전시킴으로써 국가의 비기(丕基)를 견고케 하는 대업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더 나아가 대학교육의 보편화(普遍化) ㆍ 대중화(大衆化)를 통하여 재능(才能)있는 젊은이들에게 교육기회를 균등히 부여해야 한다는 해공선생의 육영자세(育英姿勢)에서 그의 평등사상을 느낄 수 있겠다.

급속한 변화속에서 미래의 불확실성이 증대(增大)되고 있는 기술혁명시대에는 인간가치구현(人間價値具現)을 위해서 미래에 대한 부단한 대비가 필요하다. 때문에 대학교육은 그 어느때보다 더 중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점에서 대학교육의 인간화(人間化) ㆍ 전문화(專門化) ㆍ 대중화(大衆化)에 기반한 교육이념과 교육기회 균등을 통한 평등한 사회건설, 그리고 어려운 조건하에서도 민주주의(民主主義) 가치구현(價値具現)의의 당위성(當爲性)을 갈파한 해공선생의 이념과 업적은 국민대 가족의 귀감이 될 것이며 동상 건립의 의의도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사설 / ≪국민대학보≫ 1983-08-22

교내 해공 신익희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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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보창간(學報創刊) 37주년을

본보(本報)가 원래 창간호를 펴낸 날짜는 37년전, 1948년 12월 18일이었다. 당시 물자가 귀하여 난로마저 땔 수 없었던 엄동설한에 학보(學報)를 탄생시킨 것은 기어이 해를 넘기기 전에 창간(創刊)을 하고 말겠다는 창간주역(創刊主役)들의 의지 때문이었다.

1948년으로 말할 것 같으면 국민대학교의 역사에 있어 획기적인 해였다. 2년전인 1946년 3월에 교사(校舍)도 없이 오로지 교육과 면학을 통해 건학에 이바지하고자 했던 민족의 지도자들과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정신에 불탔던 청년들이 합심단결(合心團結)하여 만들어낸 것이 우리 국민대학교 창조의 서단(序端)이었다. 내수동(內需洞)의 구(舊) 보인상업고등학교 한 귀퉁이를 빌어 우선 법 ㆍ 경량과(經兩科)만으로 야간부로서 개교를 단행했던 이들은 학생들의 손으로 직접 교사(校舍)를 지어 창성동(昌成洞)으로 옮긴 것이 1948년 그해였고, 곧이어 주간(晝間)대학으로 체제를 바꾸어 좋았다. 이들이 신교사(新校舍)에서 환희의 자축연(自祝宴)을 여는 자리에서 맨 먼저 논의된 것이 학내언론(學內言論)의 창건(創建)이었고, 이에 따라 3개월의 산고(産苦)끝에 4면(面)타블로이드판(版)이었으나, 우리는 창간호(創刊號)속에 담긴 고매(高邁)한 정신(精神)과 순정(純正)한 포부를 지금도 읽을 수 있다. 아니 창간선배(創刊先輩)들의 이상과 의지와 겸허(謙虛)앞에 머리가 숙여지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지 않을 수 없는 경건함을 느낀다.

돌이켜 보건데, 우리 학보의 역사는 이 민족의 고난과 대학의 고뇌(苦惱)를 대변하는 증인(證人)이었다. 6 ㆍ 25동란이 터지자 학보는 3호(號)를 내고는 9년간이나 중단되었다. 1960년 4 ㆍ 19직전에 나온 학보는 『정치인들아 정신 좀 차려라! 폭력이 마구 지성을 때려눕히고, 신문사를 두들겨 부슨 불한당들을 비호한 정치인들아, 윤리를 알고, 전만과 판단을 할 줄 아는 정치인다운 정치인이 좀 되어 달라』고 당시의 비리(非理)를 통열히 비한하는 필봉을 들었다. 5 ㆍ 16이후 군사 쿠테타가 일어난 계엄령(戒嚴令)아래서 발간된 학보들에는 <전면검열필(全面檢閱畢)>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어 송두리 억압의 아팠던 상처의 자국을 보여주고 있다.

고난 속에서 만나는 창조와 건설의 몸부림은 지금의 우리 학보에도 예외가 아니다. 이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고 조국과 민주를 사랑하는 대학인의 대변지로서 학보는 오늘날 대학의 고뇌를 편견없이 진정으로 반영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사회에는 입법회의(立法會議)에서 졸속적으로 만들어진 언론기본법(言論基本法)이 있고 언론의 자율이 제한되는 풍토속에서 학보라고 해서 이 고통으로부터 예외일 순 없다.

금압자(禁壓者)는 금압이 타당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금압만이 고통이 아니다. 금압의 논리는 반항자(反抗者)와 반업자(反業者)는 자기들만이 타당하나고 또한 주장한다. 이같은 양쪽의 창날을 맞이하고 있는 오늘날의 대학언론의 위치w는 이 가운데서도 사리분별을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때로는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쓸쓸함이 있고, 때로는 모두로부터 경원시되는 문둥이의 신세가 될 때도 있다. 어쩌면 우리는 쓸쓸하기 위해 경원시되기 위해 쌔워왔는지도 모른다. 앞으로도 대학언론의 정도(正道)를 걷기 위해 우리의 자세를 흩트리지 말아야지. 정의롭고, 공정하고 객관적이고 지성과 이성과 인의도덕(人義道德)을 저버리지 않는 의연함을 지켜가야지. 그래서 순정(純正)한 창조와 건설의 유업을 계승해야지.

사설 / ≪국민대학보≫ 1985-06-24

국민대 첫 학보, ≪국민대학보≫ 창간호(1948.12), 2. 1950-1970년대 학보 발간사 카툰, 3. 1980년대 학보 발간 과정을 담은 카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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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원민속관과 한국의 茶문화

우리대학 후문 건너에 자리한 학교 부속 건물인 단아한 한옥의 명원민속관은, 고 명원 김미희(金美熙) 여사의 유지를 받들어 한국 차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그 교육과 보급에 힘쓰고 있는 현대 한국 차문화의 전당이다.

명원민속관이 서울시 중구 장교동에서 이곳에 옮겨온 것은 1980년의 일이다. 원래 이 집은 조선조 말기 참정대신으로서 1905년 일본에 의해 강제 체결된 을사늑약에 반대하다가 파직당한 한규설(韓圭卨)의 유택으로 서울시 문화제로 지정된 유서 깊은 곳이다.

 명원선생 -재단법인 국민학원의 이사장ㆍ이사를 역임하여 국민대학교 발전에 헌신한 성곡(省谷) 김성곤(金成坤) 선생의 부인)은 오랜 동안 한국에서 잊혀 온 차 문화를 현대에 부흥시킨 대표적인 차인이다. 그녀는 1968년부터 당시 일반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한국의 차문화 연구에 몰입하여, 차를 마시는 기구인 다구를 비롯하여 차를 재배하고 제조하는 방법은 물론 차를 마시는 예절인 다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차문화 전반에 걸쳐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것이다. 

특히, 명원선생은 국내 최초로 현대식 다실인 녹야재(綠若齋)를 만들고 생활다례를 정립하였으며 1979년에는 한국차인회 창립에 앞장서는 등, 한국차문화의 정립과 교육, 보급에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근대화 달성의 거대한 물결이 전국을 뒤덮어 모든 것이 물질에 귀결될 것 같이 생각되던 격랑의 시기에, 명원선생은 실낱같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던 전통문화의 맥을 찾아 전국을 누비며 정신의 소중함을 잔잔히 일깨워 주었던 것이다. 2000년 5월 25일, 새로운 천년의 첫 차의 날 기념식에서 명원선생은 차인으로서는 최초로 정부로부터 보관문화훈장을 추서 받았다.

1981년 애석하게도 명원 선생은 서거하였지만, 이후 명원민속관에서는 다도교육을 비롯한 다양한 차 문화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82년 국내 4년제 대학으로는 처음으로 다도가 정식 교양과목으로 개설되어, 명원선생과 함께 다문화 연구에 힘썼던 고 민길자(閔吉子) 교수가 오랜 동안 명원민속관에서 열강 하였고 지금도 많은 학생들의 수강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1981년 만들어진 학생동아리 명운다회는 명원민속관 별당을 동방으로 갖고 대학 차문화 운동을 선도하고 있다. 

가끔 조용하게 자신을 되돌아보며 사색에 잠기고 싶을 때, 차 향기 그윽한 명원민속관을 한가로이 거닐며 한 잔의 차를 벗 삼아 잠시 여유의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김동명(정치외교학과) 교수 / ≪국민대신문≫ 2003-06-02

1. 장동교의 한규설 대감 가옥, 2. 명원민속관, 3. 명원 김미희 여사, 4. 한규설 대감, 5. 우이동에 있었던 현대식 다실, 녹야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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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의 북악인은 이렇게 생각했다

1987년 6월 15일자 신문(제457호)에 실린 기사에서는 사회 전반을 비롯한 과거 북악인들의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지금부터 21년 전인 1987년 6월 15일자(457호) 국민대신문에는 ‘북악인은 이렇게 생각한다’는 제목의 여론조사 결과가 보도됐다. 당시 여론조사의 목적은 다음과 같다. ‘현실을 굴절없이 투영하고자 정치·경제·사회 그리고 대학의 문화와 본보기에 대한 견해 등을 중심으로 전 북악인들의 의견을 수렴해 현사회의 가장 큰 모순점은 무엇이고 이를 깨쳐나가기 위해서는……(생략)’

조사 문항에는 개헌이나 내각 개편,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 민주화 등 사회관련 의식을 묻는 조사가 두드러졌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언론의 기능, 학생운동에 대한 조사도 나타나 있다.

눈에 띄는 설문항목과 응답 몇 가지를 살펴보자. 당시 시국 전망을 묻는 질문에 ‘당분간 같은 양상이 지속’(58.2%), ‘예측 불허’(26.1%), ‘국민이 원하는 방향의 반대로’(10.8%), ‘국민이 원하는 방향으로’(4.3%)의 응답이 나왔다. 전두환 정권 말미의 시대적 상황에 학생들이 암울해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88올림픽이 미칠 영향에 대한 질문에는 47.6%가 ‘국민의 실질적 문제를 접어두고 행하는 사치스런 일’이라 응답했고 ‘국익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응답은 41.9%로 나타났다. 특히 단과대 중 문과대가 88올림픽을 가장 부정적(71.1%)으로 생각했다. 언론의 기능에 대해서는 66.2%가 ‘제 구실을 못한다’, 25.2%가 ‘제 역할을 다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노력하는 것 같다’고 응답해 언론의 반성과 노력을 촉구했다. 학생운동이 발생하는 이유를 순서대로 기술하라는 문항에는 ‘정치적 비민주성 및 정통성 결여’가 절반에 가까운 48.4%의 수치를 나타냈으며 ‘학원자율탄압’(37.9%), ‘외세’(35.2%), ‘남북의 분단’, ‘청년기의 일시적인 반항심리’, ‘청년기의 좌절심리에 의한 공격성’, ‘재미삼아’ 순으로 나타났다. 교내 복지 시설 중 가장 시급하게 개선을 요하는 곳으로 ‘식당’(47.4%)이 꼽혔으며 그 다음으로 ‘휴게실’, ‘서점 및 문방구’의 순으로 나타났다. 주요 불만원인으로는 ‘음식의 맛과 질이 좋지 않다’(48.1%), ‘지저분하다’(23.9%)가 꼽혔다.

국민대신문사는 이번호(832호)를 맞아 ‘국민인 의식조사’라는 큰 주제를 가지고 재학생들의 개인생활과 학교생활, 학교시설의 만족도, 사회 이슈에 대한 생각 등을 설문으로 조사해봤다. 비록 설문 내용에는 차이가 많이 있지만 20여 년 전을 반추해 지금의 국민인들을 알아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김현우 편집장 / ≪국민대신문≫ 2008-05-26

'1987년의 북악인은 이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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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동하는 젊음, 무르익는 지성

  • 82년과 84년에서 본 국민대의 해답

약동하는 젊음, 무르익는 지성

지금부터 29년전인 1979년 우리대학에서 열린 북악체전의 구호다. ‘북악체전’이라는 명칭은 종합체육대회, 교내체육대회, 춘계·추계체육대회, 백호종합체전에 이어 1975년에 처음 등장했다.

북악체전은 모든 학과·모든 학년이 참여하는 중요한 연례행사였다. 국민대신문에는 북악체전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높아 경기종목과 경기시간뿐만 아니라 진행계획과 채점기준, 예선과 결승진출상황, 최종 경기성적과 시상자까지 1면에 상세하게 보도했다. 1979년 5월 28일자 신문에는 전년까지 심판을 맡았던 체육학과가 직접 경기에 참가하게 되어 일부 학생들이 “운동을 전공으로 하는 학생들과 겨루는 것은 불공평하다”며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1976년 6월 2일과 3일에 개최됐던 북악체전에서는 레크레이션 종목과 특별종목이 대폭 추가되어 농구, 축구, 배구, 육상 등과 함께 총 22개 종목으로 진행됐다. 풍선 터뜨리기, 자전거, 별보기 경기, 망나니 길들이기 등의 종목이 큰 호응을 얻었다. 폐회 직후에는 장기자랑 - 막걸리파티 - 캠프 파이어 등의 순서로 ‘젊음의 행진’이 진행되어 참가한 학생들이 젊음을 마음껏 불태울 수 있었다.

학생들의 참여도는 북악체전의 성공적 개최의 관건이었다. 82년 5월 13일에 열린 북악체전에서는 일부학생에 국한해 참가할 수 밖에 없었던 구기종목을 없애고 모든 학생들이 참가할 수 있는 차전놀이 등의 민속경기를 새로 편성했다. 또 여학생이 참가하는 경기를 대폭 늘리는 등 대회 진행에서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였다.

1984년 5월 19일에 열렸던 북악체전에는 게임위주의 체전을 지양하고 대학자율화, 민중과의 호흡, 인권 회복에 대한 학생들의 열망을 반영하기 위해 마당놀이를 마련했다. 700여명의 국민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민주학우여 여기’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폭력타도’, ‘인권회복’이 써져 있는 머리띠를 두른 채 민주화를 염원하는 굿과 폭력경찰 화형식 등으로 구성한 마당놀이를 연출했다. 당시 학보에는 “마냥 즐기기 위한 행사에서 좀더 깨치고 한데 어우러져 보려는 북악체전을 만들지 못한 데에 대한 자성이 북악골에 울려야 한다”고 실려 있다.

강혜령 기자 / ≪국민대신문≫ 2008-10-06

1. 1976년 춘계북악체전 모습(1976.6), 2. 1976년 춘계북악체전 당시 캠프파이어 장면 3. 1984년 북악제천 당시 마당극 장면, 4. 1982년 춘계 북악체전 당시 농악대 공연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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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82년과 84년에서 본 국민대의 해답

1980년대는 민영방송이었던 TBC가 언론 통폐합을 통해 KBS에 흡수되면서 공중파로는 KBS와 MBC만이 유일하던 시절이었다. 이 때 컬러TV가 통용되면서 공중파는 대중의 이목을 더욱 끌었으며, 기자나 아나운서는 선망의 대상이 됐다. 당시에도 방송사 공채는 경쟁이 치열해 입사가 쉽지 않았다. 공채 시험의 난이도는 악명이 높았으며 합격을 위해선 수백 대일에 달하는 경쟁을 뚫어야했다. 그러던 1982년, 우리학교에서 MBC 아나운서 공채 합격자가 탄생했다. 82년 합격한 故 송인득(경제·78학번)동문은 MBC 스포츠 시청률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이후 우리학교는 MBC 입사의 물꼬가 트여, 84년 공채에서는 기자 2명과 아나운서 1명이 배출됐다. 국민대 개교 이래, 언론사 공채에서 이 같은 성과를 낸 사례는 드물다. 84년 기자 합격을 거머쥔 김석진(정외·77학번)동문과 문철호(한문·78학번)동문은 각각 모스크바 특파원, 보도국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같은 해 아나운서에 합격한 동문은 바로 현재 대중적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손석희(국문·76학번)동문이었다. 어릴 적부터 기자가 되기를 열망했던 김석진 동문은 학창 시절을 도서관에 바친 끝에, 졸업하던 해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의 영광을 얻었다. 또한 손석희 동문은 모 일간지 판매국에서 일하면서 직장 근처 여관에다 거처를 잡고 입사 준비를 병행하는 등 노력을 다해 합격을 이뤘다.

이들이 공중파 입사에 성공했던 80년대 초중반, 우리학교 위상은 그리 높지 않았다. 학벌과 인맥에 기대어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어진 여건에 개의치 않고 오로지 꿈을 향해 전진한 우리의 선배들은 모두 꿈을 성취했다. 김 동문은 과거 <국민대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어려운 일을 기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뭐든 남들보다 배로 노력해야 한다”며 우리학교 학생들에게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바 있다. 이처럼 ‘노력’을 강조하는 김 동문의 말은 비단 우리학교 재학생뿐만 아니라 우리학교의 발전방향 자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다.

우리학교는 자동차·디자인 등을 특화시키며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뤄냈으나 명문대로 가는 길목에서 오랜 기간 머물러 있다는 말을 듣고 있다. ‘중앙일보 대학 평가’에서는 2년째 30위권을 맴돌고 있다. 학교의 고질적인 공간 부족 문제도 커다란 과제다. 이와 같이 당면한 과제를 앞에 두고도 ‘고강도’가 아닌 ‘설렁설렁’ 노력을 한다면 이도저도 아니게 될 것이 분명하다.

우리학교는 녹록하지 않은 환경에서 혼신의 노력으로 언론인이 된 동문의 모습을 되새기며 열심히 뛰어야한다. ‘정부재정지원제한대학’의 오명은 벗어났으나 우리학교의 ‘발전’은 이제 시작이다. 학령인구의 급속한 감소로 인해 당장 2018년부터 대학 입학 정원이 고교 졸업자수를 초과한다. 이로 인해 벌어질 고등교육계의 생존 경쟁에 우리대학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학우들도 7~80년대와 비교해봤을 때 학교의 여건이 크게 나아졌다는 것을 주지하고 용감히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막연하게 환경 탓만 하다 주저앉을 수는 없다. 우리학교 선배들이 열정과 노력으로 이뤄냈던 꿈을 상기하며 국민인도, 우리대학도 미래를 향해 끊임없는 노력과 도전을 펼쳐야 할 것이다.

고동완 기자 / ≪국민대신문≫ 2013-09-10

김석진(정외·77학번)동문과 문철호(한문·78학번)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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